[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술잔 기울이며 생각하는 시간 마련… 생활의 변화 생기고 대인관계에 이바지
한때 술을 우습게 봤다. 인내심이 얼마나 많으면 간신히 엉덩이만 걸칠 수 있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에 앉아서 술 취한 인간들의 그 똑같은 얘기를 잘도 들어준다 싶어, 아예 술자리를 피하던 시절이 있었다. 역시 한때였다. 꽤 심각하게 ‘알코올 클리닉에 가봐야 하지 않나’를 고민하는 요즘으로서는 정말로 ‘천국보다 낯선’ 시절이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이 지경이 된 건 ‘와인의 맛’을 알게 된 이후부터다. 2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나미비아를 열흘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함께 여행 간 사람들과 어울려 밤마다 질 좋은 남아공 와인(흔히 ‘와인’ 하면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떠올리지만 최근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남아공의 와인이 주목을 받고 있다)을 마시며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길고 긴 저녁식사를 하곤 했다. 그것은 테이블 위에 와인이 놓여 있으니까 별다른 유대감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쾌한 대화가 오고 갔기 때문인데, 무엇보다 놀라운 건 걸핏하면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던 한 신문사 기자를 향해 막연한 적의를 품고 있던 내가, 와인 몇잔이 들어가자 그의 잘난 척하기 위해 쏟아내는 일화들을 잘도 들어주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연신 웃으며. 말하자면 와인이 나 자신을 퍽이나 너그러운 인간으로 만들어줬다.
그 이후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서울에 돌아온 나는 밤마다 혼자 와인잔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조금씩 내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처음엔 와인잔을 사들였고, 그 다음엔 와인 마시기 근사한 장소를 갖고자 마당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됐고, 그러자 그 마당에 놓아둘 흔들의자와 테이블을 사들였고, 마지막으로 화단을 만들었다. 그 결과 언제부터인가 나는 집에 돌아오면 만사 제쳐두고 흔들의자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거나 앞집 목련나무를 쳐다보았다. 1시간, 2시간, 어떨 땐 오후 2시부터 어둠이 올 때까지…. 때로는 어둠 속에서…. 그러니까 와인은 나로 하여금 혼자 있게 했다.
파스칼이 그랬나? 인간이 불행한 건 제 집에 혼자 고요히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와인이 나처럼 떠들썩하고 산만한 여자에게 그런 ‘철학적으로 행복한 시간’을 허락해주었다고 하면, 역시 너무 거창한 말일까? 그런가 하면 ‘와인’은 나처럼 대인관계 허술한 여자에게 쉽게 여러 층위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한다. 아직까지 그 애호가가 많지 않은 관계로 상대편이 와인을 즐겨 마신다고 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친구가 된 것 같은 터무니없는 유대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한번은 패션 피플들 사이에서 유명한 압구정동 만두집 여사장님(전직 배구선수였던 그녀는 주방에서 만두 끓이면서도 질 샌더 셔츠에 상하이에서 산 트레이닝 팬츠를 받쳐입는다)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와인을 즐겨 마신다고 하자 그녀는 아주 좋아라 하며 ‘오늘밤 가게 셔터문 내리고 마주앙이나 마시자’고 재촉했다.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무엇이나 마찬가지지만 어떤 특별한 기호를 갖는다는 건 역시 같은 기호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다. 물론 이제는 술꾼이 다 된지라 와인이든 소주든 가릴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정직한 목구멍은 언제나 소주보다는 와인을 원하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내 목구멍의 그 호사스러운 기호를 존중하는 이유는 ‘궁상스럽지 않게 나로 하여금 혼자 있게 한다’는 것이다.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파스칼이 그랬나? 인간이 불행한 건 제 집에 혼자 고요히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와인이 나처럼 떠들썩하고 산만한 여자에게 그런 ‘철학적으로 행복한 시간’을 허락해주었다고 하면, 역시 너무 거창한 말일까? 그런가 하면 ‘와인’은 나처럼 대인관계 허술한 여자에게 쉽게 여러 층위의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한다. 아직까지 그 애호가가 많지 않은 관계로 상대편이 와인을 즐겨 마신다고 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친구가 된 것 같은 터무니없는 유대감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한번은 패션 피플들 사이에서 유명한 압구정동 만두집 여사장님(전직 배구선수였던 그녀는 주방에서 만두 끓이면서도 질 샌더 셔츠에 상하이에서 산 트레이닝 팬츠를 받쳐입는다)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와인을 즐겨 마신다고 하자 그녀는 아주 좋아라 하며 ‘오늘밤 가게 셔터문 내리고 마주앙이나 마시자’고 재촉했다.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다. 무엇이나 마찬가지지만 어떤 특별한 기호를 갖는다는 건 역시 같은 기호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힘이 있다. 물론 이제는 술꾼이 다 된지라 와인이든 소주든 가릴 처지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정직한 목구멍은 언제나 소주보다는 와인을 원하고 있다. 무엇보다 내가 내 목구멍의 그 호사스러운 기호를 존중하는 이유는 ‘궁상스럽지 않게 나로 하여금 혼자 있게 한다’는 것이다.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