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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살내 풍기는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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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2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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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의 역사가 외면한 조선 보통사람들의 생활… 다양한 문헌 토대로 상상력 덧입혀 풍속사 복원

‘고요한 아침의 나라’. 19세기 조선을 방문했던 한 외국인은 이렇게 표현했다. 당시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였던 일본에 비해 근대화에 어두웠던 조선은 아침이 온 줄도 모르고 밤처럼 고요하기만 한 나라였는지 모르겠다. 맥락이야 어쨌든 우리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말을 동방예의지국에 대한 서구의 공증처럼 받들며 살아왔다. ‘에헴, 그러니까 우리는 본래 인의를 받들고 염치를 아는 예의바른 사람들이었던 게야’ 하면서.

민간의원에서 도둑, 탕자·탕녀까지

한문학 전공자인 강명관 교수(부산대)가 쓴 <조선의 뒷골목 풍경>은 옛 사람들의 생활이 우리의 기대어린 상상처럼 ‘고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요즘 사람들이 출장지에서 고스톱으로 밤을 밝히는 것처럼 연암 박지원도 중국 출장 가서 역관·비장배들과 투전판을 벌였다.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이 돈을 따서 무척 자랑스러워하는 장면이 아무렇지 않게 묘사돼 있다. 옛 사람들은 부모 상을 당하면 묘소 앞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애통해했다고 하지만 상중에도 고기와 술을 먹고 기생과 놀아 벌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임금의 권위가 지엄했다고 분명 배웠는데, <실록>의 사관은 성종이 궁중에서 벌인 대보름 잔치에 초대받은 한 신하가 “구름이 달을 가린 틈을 타” 기생과 사랑을 벌였다고 적고 있다. 한양의 골목에선 양반끼리 애첩을 놓고 주먹다짐을 벌이기도 했고, 기생들이 화려한 치맛자락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다녔으며, 온갖 사치품으로 치장한 별감(왕이 사용하는 붓·벼루 공급, 열쇠 관리를 맡는 액정서 소속 관직)들이 악사를 불러놓고 뻑적지근한 놀이판을 벌였다. 왕과 신료로 대표되는 성리학적 질서에 편입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의 활기찬 욕망들이 시정을 달구고 있었던 것이다.


지은이는 역사서, 개인 문집, 회고록, 시가 등 다양한 문헌에 역사적 상상력을 덧입혀 조선시대 뒷골목을 어슬렁거렸던 열 가지 부류의 비주류를 복원해냈다. 민간의원, 도둑, 도박꾼, 술꾼, 무뢰배, 탕자·탕녀 등 정식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잊혀진 사람들이다. 왕의 건강을 돌보았던 어의보다 실력이 뛰어나 정조의 종기를 단 삼일 만에 치료했던 민간의원 피재길, 손톱·머리카락·오줌·똥·때 등 더럽고 하찮은 것들을 약재로 사용한 이동은 등은 국립 의료기관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준 ‘민중의’였다. 한발의 침만으로 씻은 듯 통증을 치료하는 ‘민중의’들은 때로 사람과 귀신의 경계에 서 있는 전설적 명의로서 미화되기도 했다.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일지매’는 붉은 매화 한 가지를 찍어놓는 것으로 의적의 낭만성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도적은 직업적 절도·강도범이라고는 볼 수 없는, 농토에서 유리된 일반 백성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탄압받던 승려들은 ‘땡추’로 변해 산적패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주요 통신망이 되기도 했다. 지은이는 <백범일지>에 등장하는 불한당 괴수 김진사의 증언과 스님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등을 얽어 구한말까지 남아 있던 도적의 양대 세력인 목단설(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도적)과 추설(경상·전라·충청의 도적)이 각각 금강산 땡추, 지리산 땡추와 연계됨을 추리해낸다. 다시 말하면 ‘모이면 도적이 되고 흩어지면 백성이 되는’ 혼란스런 사회에서 홍길동을 스스로 자신의 연원으로 삼는 화적단의 존재는 단순한 범죄 집단이 아니라, 도적이 영웅 되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반체제 집단이었던 것이다.

조선 관료사회를 지탱해주는 과거시험 풍경만 해도 화장실도 제대로 가기 힘든 요즘의 엄숙한 고시장과는 사뭇 달랐다. 정조 때는 21만명에 이를 정도로 응시자가 많았기 때문에 과거날 아침 궁궐문이 열리면 좋은 자리(시험문제가 잘 보이고 빨리 답안지를 낼 수 있는 자리가 경쟁이 치열했다)를 잡느라 북새통이 되곤 했다. 수험생 도련님들을 수발하는 노비에다 술 파는 장사치까지 과거장에 들어왔다니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족집게 대리시험 전문가인 거벽(과거 답안지를 대신 지어주는 사람)과 사수(글씨를 대신 써주는 사람)까지 판쳐 시험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지은이는 <청구야담>에 실린 단편 ‘시골 유생을 속여 박생이 과거에 합격하다’를 통해 과거의 실상을 파헤친다. 여기서 박생은 다름 아닌 암행어사 박문수인데, 박문수가 시험 전 서울 성내를 돌아다니며 누가 거벽이고 누가 사수인지 탐문하여 과거장에서 이들을 협박함으로써 거벽과 사수의 힘으로 과거에 급제한다는 내용이니 박문수는 과거 실력은 몰라도 ‘암행’에선 이미 전문가였음이 틀림없던 모양이다.

방탕한 풍속을 드러내는 데는 탕자·탕녀가 빠질 수 없다. 당나라 현종이 아들의 며느리인 양귀비를 사랑했던 것을 두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조선시대 사대부 사회에도 인륜을 거스르는 간통이 비일비재했다. 아버지의 첩 또는 처제와 잠자리를 같이 해 벌을 받는 사건도 많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탕자’들은 벼슬을 빼앗는 정도로 마무리됐던 반면 ‘탕녀’들은 극형에 처해졌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40여명의 사내와 정을 통했다 하여 목숨을 빼앗긴 감동(감독 유영진, 이보희 주연의 88년작 <깜동>의 주인공)이 악질적인 성폭행 뒤에 방탕의 길로 빠져들었는데도 이런 사정은 고려되지 않았다고 성토한다.

정녕 당대를 움직인 동력은 무엇이었나

백정은 아니되 소를 도살하는 일에 종사했던 반촌(泮村) 사람들도 주목할 만하다. 조선시대 때는 소 도살이 가뭄을 부른다는 이유로(농사를 짓는 소중한 도구를 함부로 죽이면 소들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 가뭄을 일으킨다는 주장이었다) 도살억제 정책을 펼쳤다. 그런데 쇠고기 식용은 금지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소를 주로 먹는 사람들이 사대부 자신들이었으므로. 특히 국립대생들인 성균관 학생들은 반찬으로 쇠고기를 먹었는데 성균관 주변에 촌락을 이루고 살며 ‘하숙촌 산업’에 종사하던 반촌민들이 소를 도살하는 독점 권리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들 반촌민은 바깥 사람들과는 일체 교류하지 않으며 자신들끼리 혼인하고 말씨와 풍습도 달랐다. 서울의 한복판인 성균관 일대에서 이처럼 외부와 고립된 게토가 존재했다는 것이 흥미롭기만 하다.

이처럼 어디 내놓고 자랑할 성질은 아니지만 호기심을 돋우는 풍속사를 연구하는 이유에 대해 지은이는 ‘세계적 민족 문화유산’이란 이름으로 추상화·미화·왜곡하는 풍조에 반기를 들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그래서 지은이는 우리나라가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국이라는 것만 자랑하지 말고 그보다는 88년 뒤 늦게 발명됐지만 실제로 인쇄·출판·지식의 흐름을 돌려놓았던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어떻게 역사를 변화시켰는지 구체적으로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찬란한 문화유산’이라는 허영보다는 그 사회를 실제로 움직인 동력을 찬찬히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틀을 씌우기 이전에 분명히 존재했던 개똥이, 소똥이, 말똥이들의 삶을 들여다봄으로써 “단일한 중심만을 내세워 애써 중심을 닮게 하는 중심적 담론의 독재”에 저항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조선 뒷골목 사람들을 바라보는 애정어린 시선에 녹아 있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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