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영화에서 ‘이혼에 대한 경각심’을 말하는 준비된 감독 방은진
나는 그녀가 4년 전에 김진한 감독의 <장롱>에 조감독 일을 한다고 했을 때만 해도 그저 영화를 너무 사랑하는 똑똑하고 연기 잘하는 여배우가 ‘경험 삼아’ 스태프 일을 한번 해보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리고 아는 감독 영화의 스틸기사까지 해준다고 할 때도, ‘영어 잘해서 연기이론 책도 번역하더니 스틸까지? 그 양반, 참 재주도 많네’ 하면서 할 줄 아는 건 연기밖에 없는 나로선 그저 부럽고 신기하기만 했다. 한데 그녀가 감독을 하겠다고 했을 땐 많이 놀랐다. 게다가 시나리오까지 직접 쓴다는 얘기를 듣고서 그녀의 재주를 질투하는 또래 여배우로서의 마음은 까맣게 잊고 배우 방은진을 좋아하는 팬으로서 걱정이 앞섰다.
번역에 스틸기사 역할까지 하더니…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난 이제 막 입봉 감독 출사표를 던진 남자와 함께 살고 있다. 배우부모에게서 태어나 배우들 틈에 자라고 배우를 업으로 삼다가 스태프와 결혼을 한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1차생산을 하는 시나리오 작업을 옆에서 보아오면서 실로 그 끝없는 고행의 연속에 구경만 하는 것임에도 진이 빠져 있던 차였다.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갑남을녀들을 등장시켜 그럴 듯한 ‘뻥’을 만들고 그걸로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는 일이란 보통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내 신랑이야 원래 하고자 한 길이 그거였으니 그렇다 치고, 박철수 감독이 우리나라 여배우는 방은진밖에 없다고 말하던 바로 그 여배우가 왜 험난한 길을 가려 하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인터뷰를 핑계로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예전의 그 묘한 퇴폐미와 함께 이지적이면서도 섹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100년 동안 글만 써온 사람처럼 초췌하고 깡마른 채 눈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진촬영을 위해 자연스럽게 걸어달라는 사진기자의 주문에 ‘배우로 걷는’ 걸 잊어버렸다면서 어색해하는 그녀의 모습은 카리스마 넘치던 여배우 방은진 대신 수줍고 겸손한 신인감독 방은진 그것이었다. 신랑이 영화감독 지망생이 아니었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여태까지의 과정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여기까지 온 것만도 박수 받을 일이지 싶어 선배지만 그녀가 너무 기특하게 생각됐다. 그녀 자신도 어찌됐든 간에 절대시간을 싸워 이긴 자신이 대견스럽다고 했다. 1990년대 말. 안 그래도 역할이 없어 힘든 30대 여배우인데 작품 몇개가 연달아 엎어지니까 뽑히기만 기다리는 배우 인생에 환멸이 느껴지더란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카메라 뒤’가 궁금했었기에 저질러보고 싶었단다. 영화를 너무 좋아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감독의 예술이라 아무리 주인공을 해도 ‘남의 잔치’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고 온전한 자기 것을 해보고 싶었다는 거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내게 그저 영화에 대한 애정이 다른 길로 자랐다고 봐달라고 말하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엔 이미 내공이 가득 차 있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아직 시작도 안한 영화에 벌써부터 신뢰감이 생겨버렸다.
하극상의 최상, <첼로>의 스토리
그녀가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작품 <첼로>(얼마 전까지는 ‘엄마, 미안해’였다)는 엄마의 새 남편, 즉 새 아버지와의 사랑을 얘기한다. 한국판 <데미지>이지만 그 끝이 확연히 다르다. ‘응징’으로 끝난 <데미지>에 반해 <첼로>는 엄마가 자기의 새 남자를 딸에게 “그래. 너 가져라” 하며 ‘쿨’하게 끝난다. 한국 정서에 맞을까 하는 염려들도 있지만 셋이 다 흩어지는 비극으로 끝나면 너무 뻔하지 않겠느냐가 그녀의 생각이다. 뻔한 스토리 보여주려고 3년 고생한 거 아니라면서 ‘얘깃거리’가 되길 희망한단다. ‘썬데이 서울’에 실렸을 만한 장면들은 피해갈 생각이다. 딸의 나이가 십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육체의 불륜’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맘대로 이혼하고 재혼하는 건 어떻게고 합리화시키면서 사랑이 찾아왔는데 그 사랑이 피 한 방울 안 섞였음에도 불구하고 ‘엄마의 남자’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건 불공평하지 않느냐는 게 이 영화의 주제라면 주제다. 하극상의 최상이다. ‘얘깃거리’가 되고도 남을 소리다.
영화를 만드는 데에서 소재는 일종의 미끼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극적일 수 있는 소재로 일단 관객을 끌어모은 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얘길 하는 거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도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만드느냐에 따라 메시지는 달라진다. 그녀는 이혼에 대한 경각심을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혼자녀에 대한 인권, 게다가 그 자녀가 어린 나이일 때 영원히 치유되지 않는 상처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얘길 했다. 그녀 역시 결손가정의 피해아동이었다. 이 영화는 말하자면 그녀 자신의 정체성 중 어두운 구석, 그것에 대한 ‘커밍아웃’인 셈이다.
섹스 얘기서부터 시작해 여자 얘기, 이혼 얘길 거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이창동 감독(난 그를 앞으로도 계속 감독이라고 부를 예정이다)의 조언이 많은 힘이 됐다고 한다. 주류의 장벽을 넘으려면 너무 어렵게 가지 말라고 했단다. (자기는 작품마다 어려운 얘기만 해대놓고 남한텐 하지 말라니 자기만 멋있게 보이려는 고약한 심보가 아닐 수 없다) 관객과의 타협점을 찾아 멜로를 택하되, 결코 말랑말랑하지 않은 금기에 도전하는 멜로를 하는 것이 그녀의 현재 목표다. 시나리오를 본 ‘씨네2000’의 이춘연 사장은 최근 10년 동안 보아온 시나리오 중 최고로 살아 있는 대사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배우가 쓴 대본이니 그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말이 3년이지 정말 긴 시간이다. ‘굿판’이 그립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왜 아니겠는가. 쓰는 중간중간 몇번의 고비가 있었고 그럴 때마다 출연 섭외가 유혹처럼 다가왔지만, 어렸을 때부터 막연한 꿈이었던 영화감독의 길이 아무 때나 주어지는 게 아닌지라 등 떠밀려서(이 영화의 제작자인 명계남이 그녀의 등을 떠민 장본인이다) 할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생계유지는 주말에 하는 교통방송이 전부이고 쓰는 일에만 매달려왔다고 하지만, 그녀는 틈틈이 이라크 파병 반대 일인시위, 새만금 지키기 삼보일배 같은 평화운동에 참여해왔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면서 딴따라는 관객의 사랑을 먹고사는 것만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인간은 어차피 서로 도우며 살게 돼 있으니 그런 일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 든든한 나의 딴따라 동지 방은진!
출연은 안 하냐고?
영화감독 되는 길은 산 넘어 산이란다. 아닌 게 아니라 시나리오가 나오고 캐스팅 작업 중이라지만 현장에서의 그녀의 모습이 사뭇 궁금하다. 카메라 뒤에서 “레디고! 액션!”을 외칠 그녀를 생각하니 내가 다 떨릴 지경이다. 현장 지휘는 어떻게 할 거냐니까, 생면부지 볼모의 땅을 헤쳐왔으니 앞으로도 ‘막가파’ 정신으로 하면 되지 않겠느냐며 씩 웃는다. 극 중 엄마 역할이 딱 그녀 나인데 출연은 안 하냐고? 죽도 밥도 안 될까봐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러나 언젠가는 쓰고 주연하고 연출하는 것도 꼭 해볼 거란다. 할 수 있을 거다. 그녀는 준비된 감독이니까.
연기로 관객을 행복하게 해준 그녀. 이제 영화감독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리라 믿는다. 준비된 감독, 방은진! 화이팅!
오지혜 | 영화배우

사진/ 이용호 기자
인터뷰를 핑계로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예전의 그 묘한 퇴폐미와 함께 이지적이면서도 섹시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100년 동안 글만 써온 사람처럼 초췌하고 깡마른 채 눈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사진촬영을 위해 자연스럽게 걸어달라는 사진기자의 주문에 ‘배우로 걷는’ 걸 잊어버렸다면서 어색해하는 그녀의 모습은 카리스마 넘치던 여배우 방은진 대신 수줍고 겸손한 신인감독 방은진 그것이었다. 신랑이 영화감독 지망생이 아니었다면 그냥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여태까지의 과정을 미루어 짐작하건대 여기까지 온 것만도 박수 받을 일이지 싶어 선배지만 그녀가 너무 기특하게 생각됐다. 그녀 자신도 어찌됐든 간에 절대시간을 싸워 이긴 자신이 대견스럽다고 했다. 1990년대 말. 안 그래도 역할이 없어 힘든 30대 여배우인데 작품 몇개가 연달아 엎어지니까 뽑히기만 기다리는 배우 인생에 환멸이 느껴지더란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카메라 뒤’가 궁금했었기에 저질러보고 싶었단다. 영화를 너무 좋아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감독의 예술이라 아무리 주인공을 해도 ‘남의 잔치’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고 온전한 자기 것을 해보고 싶었다는 거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는 내게 그저 영화에 대한 애정이 다른 길로 자랐다고 봐달라고 말하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엔 이미 내공이 가득 차 있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아직 시작도 안한 영화에 벌써부터 신뢰감이 생겨버렸다.

사진/ 배우 방은진이 아닌 감독 방은진의 한마디 한마디엔 이미 내공이 가득 차 있었다.(이용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