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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멋 내며 기부하면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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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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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영화 <어바웃 슈미트>를 본 뒤 나만의 기준으로 기부단체를 찾기까지

나라는 인간은 그게 트렌디한 라이프 스타일이라면 심지어 자선활동도 따라하는 허영덩어리다. 그래서 언제나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다. 나의 보스인 국장에게 1만원, 10만원씩 푼돈을 꿀 때마다 이런 욕을 먹기도 했다. “내 주변에 너처럼 삶의 질이 높은 X도 없지만 너처럼 가난한 X도 없다.” 나는 지난봄부터 필리핀의 한 남자아이를 후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게 실은 다 영화 한 편 때문이다. <어바웃 슈미트>라는 영화였는데, 볼품없고 괴팍한 중늙은이를 연기하는 잭 니콜슨이 어린이 1대1 결연단체를 통해 알게 된 탄자니아의 어린이 ‘엔구두’에게 하루 77센트(1천원)와 자신의 일상을 담은 편지를 보내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나는 잭 니콜슨이 ‘Dear. 엔구두’로 시작하는 내레이션을 할 때마다 그 목소리의 울림에 감동받고 그 비상식적인 편지 내용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마 감동적이기만 했다면 그런 기부활동이 그렇게 쿨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리라.

암튼 극장 문을 나서며 우리나라에도 저런 방식의 어린이 후원 프로그램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간혹 <사랑의 리퀘스트> 같은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서 마음이 동하여 ARS 전화번호를 누를 때마다 지속성 없는 내 얄팍한 동정심을 은근히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보낸 2천원을 누군가가 혹 떼어먹는 게 아닐까 싶어 노심초사해왔던 터였다. 그리하여 그날 밤 당장 ‘어린이 1대1 후원’이라는 검색어로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과연 그런 단체가 있긴 있었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산하의 어린이 결연 사이트(www.hunger.or.kr)가 그것이다. 물론 영화에서처럼 편지 왕래도 할 수 있었다. 점심을 굶는 한국 아이들을 돕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하지만 뭐랄까?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하자면 나는 기왕이면 잘생긴 남자 어린이에게서 영어편지를 받고 싶었던 거다. 그 와중에도 무슨 자판대의 생선 고르듯 얼굴을 보고 결연 맺을 아이를 골랐으니 나 같은 여자는 기부금을 내고도 지옥에 가야 마땅하다.


게다가 매달 내 통장에서 매월 2만원씩 빠져나가긴 했지만 어느새 나는 그 애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편지를 받았다. 카드 겉면엔 필리핀 어느 땅에 피어 있었을 들꽃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안에는 드래곤볼 그림과 함께 짧은 영어편지가 있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녀석은 감사하다며, 후원자님의 이런 선의가 언제나 지속되길 바란다며, 심지어 편지 말미에는 ‘God Bless you!!!’라고 적혀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그애의 편지가 나에게 뻔뻔스러운 자신감을 줬다. 쳇, 지금 당장 가난한 아이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들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우리 시대 가난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는 이들이 아닌 것이다. 나처럼 멋으로라도 트렌디한 기부활동에 참여하는 자들이다. 그러니 그게 모방이든, 위선이든, 가식이든 혹은 섣부른 동정이든 어떠랴 싶다.

요즘 들어 불우이웃돕기 ‘성금’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 기부 문화에 자발적이고 다양한 기부 트렌드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 같다. 내 경우 역시 멋으로 내셔널트러스트 본부(한마디로 이 운동은 내 돈으로 땅을 사서 우리 문화유산을 지속적으로 보존하자는 거다)와 녹색연합의 야생동물소모임에 매월 약간의 기부금을 내고 있는데, 나로서는 그런 멋부림은 골백번 해도 좋다고 믿고 있다.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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