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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고감도 공포로 인간을 비웃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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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1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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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모르던 두려움 속으로 유도하는 로베르 브레송 · 라스 폰 트리에 · 이수연의 공포영화

호러 장르가 아니어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영화들이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존재가 괴물로 변하는 순간을 적나라하게 보게 될 때다. ‘나’와 ‘너’의 실체를 까발리는 영화들이 한국산 호러들이 득세하는 여름 극장가에 슬쩍 끼어들고 있다. 그것들은 부담스러워보이는 작가주의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정작 지켜보는 우리 자신의 껍데기를 홀랑 벗겨내며 ‘너의 진실은 이런 거 아니었니?’라며 현기증 나는 공포 체험을 안겨준다. ‘위대한 시네아스트’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들, 거장인지 사기꾼인지 애매한 노선을 취하며 평단의 지적 능력을 테스트하는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그리고 ‘감성 미스터리’ <4인용 식탁>. 아무 상관도 없어보이는 이 영화들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근대의 명제를 확실히 파괴해버리는 가공할 내공을 보여준다. 생각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는 이 명제는 이성의 빛을 받아 계몽의 세기를 활짝 열어젖힌 근대의 서막이었다. 이성적 존재라고, 그래서 합리적 사고가 가능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간이 이 영화들 앞에서 초라하게 꼬꾸라진다. 브레송은 아주 오래전인 60년대부터 그 격파 작업을 시작했고, 국내에선 30대 초반의 여성감독이 최근에야 그 무서운 진면목을 보여준다.

껍데기를 벗은 현기증 나는 공포

사진/ 브레송의 영화들은 ‘인간’에 대한 마지막 희망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부산 해운대로 향하는 피서객이라면 수영만요트경기장 안에 있는 시네마테크 부산의 ‘로베르 브레송 특별전’(8월16~31일·051-742-5377, 5477·www.piff.org/cinema)을 방문해보자. 각별한 피서 경험을 맛볼 수 있다. 40년 동안 불과 13편을 내놓았지만, 모두 걸작이란 칭호를 얻은 브레송 영화들 중 10편을 상영한다. 일단 <사형수 탈주하다>(1956)나 <소매치기>(1959) 같은 작품은 할리우드 장르 영화가 최고의 오락성을 보장해줄 거라는 항간의 믿음을 순식간에 해체해버릴 만큼 흥미진진하다.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의 한 감옥에서 사형을 앞두고 탈옥을 시도하는, 실존했던 레지스탕스의 일거수일투족이나 부조리한 사회에서 나의 범죄가 죄 될 게 없다고 확신하는 청년의 아슬아슬한 범죄 행각은 숨 막히는 긴장감의 연속이다. 50년대까지만 해도 브레송은 세상을 낙관한 모양이다. 두 영화는 누아르적 어두움에 휩싸여 있기는 해도 끝은 구원과 희망이었다. 그런데 2년 연속 작품을 만들어낸 희귀 사례에 속할 <당나귀 발타자르>(1966)와 <무셰트>(1967)에서 절망의 전조를 드러내더니 브레송 영화의 마지막 두 작품 <아마도 악마…>(1977)와 <돈>(1983)은 헤어나올 수 없을 듯한 참담한 결론으로 귀착한다. 브레송 영화의 놀라운 점 가운데 하나는 배우의 얼굴에서 표정을 걷어내는 데 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움직이는 배우는 브레송의 손발이 되어 정교한 표현기계가 되는데, 이는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려고 애쓰는 여느 영화들보다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놀랍게도 이런 장기는 당나귀를 주인공으로 삼은 <당나귀 발타자르>나 어린 10대 소녀의 운명을 끈덕지게 좇아가는 <무셰트>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고다르가 “가장 완벽한 브레송 영화”라고 극찬한 <당나귀 발타자르>는 발타자르가 인간이라는 끔찍한 굴레에 갇혀 숨을 거두기까지 일련의 시간과 사건을 물 흐르듯 보여준다. 당나귀의 시점으로 드러나는 인간의 부조리함은 가공스럽다. <무셰트>에서 14살 소녀 무셰트의 조건은 기본적으로 참혹하다. 병으로 꼼짝할 수 없는 어머니,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끝없이 울어 보채는 갓난아기 남동생을 돌봐야 할 처지다. 가족도 끔찍하지만, 무셰트는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마음 붙일 곳이 없다. 어린 무셰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건 탈출의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표정을 걷어낸 배우들… 우화 속의 공포

사진/ 라스 폰 드리에의 <도그빌>은 악마 같은 인간 본성을 현미경처럼 해부한다.
<당나귀 발타자르>와 <무셰트>는 그래도 우화적인 느낌이다. <아마도 악마…>와 <돈>은 정면으로 인간과 사회의 조건을 질타한다. 청년 찰스는 꽤 활동적이고 지적인 학생이다. 그런데 벌써 그는 지쳐버렸다. 파괴를 선언하는 급진적인 정치집단도, 믿음이 세상을 구하리라고 설파하는 교회도, 아늑함을 안겨줄 법한 사랑스런 연인도 ‘구원’이 되지 못한다. 도움을 청했던 정신분석은 기계적 해석을 되풀이할 뿐이며, 스스로 해방됐다고 자부하는 듯한 세느 강변의 히피들의 자유로움은 철없고 위선적이다. 찰스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친구에게 권총을 쥐어주며 자신을 죽여달라고 한다. 친구는 마지막 말을 마무리하기도 전에 찰스를 죽이고는 그의 호주머니에서 돈을 빼간다. <돈>은 ‘교환가치’의 잣대가 되는 ‘돈’이 주인공이다. 용돈이 궁한 두 학생이 만든 위조지폐 5천프랑이 문제였다. 위조지폐의 피해자가 된 주유원 이본은 거꾸로 범죄자로 몰린다. 결백을 재판에서 입증하려 하지만 위증 덕에 패소하고 감금당한다. 그 사이 딸은 죽고 아내는 떠난다. 자살마저 허용받지 못한 그는 조용히 살인기계가 된다. 브레송 자신도 그의 영화들처럼 차츰 구원의 가능성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그는 지독한 염세주의를 드러낸 <아마도 악마…>와 <돈>을 끝으로 은둔자가 됐고, 1999년 세상을 떴다.

브레송 영화는 인간 자체와 인간이 처한 조건이 어떠한지 표면으로 드러내줄 뿐이다.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은 인간에게 어떤 선의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과정을 무려 3시간에 걸쳐 정밀하게 다룬다. 미국 록키산맥의 작은 마을 ‘도그빌’로 숨어들어온 아리따운 여자 그레이스(니콜 키드먼)가 비참한 노예가 되고 공개적으로 성적 학대를 받게 되기까지의 과정이다. <도그빌>의 관극 체험(잘 알려졌다시피 이 영화는 브레히트의 연극적 방식으로 연출됐다)이 섬뜩한 건, 트리에의 전작들 <브레이킹 더 웨이브>나 <어둠 속의 댄서>의 신파조를 말끔히 거둬냈기 때문이다. 평화롭던 사람들이 어떻게 신조차 용서하기 힘든 본성을 드러내는지 현미경처럼 들여다보게 한다. 특히 논리와 이성의 힘으로 최선의 방책을 궁리하려드는 톰 에디슨이 그레이스를 끔직히 아끼는 듯하지만 결국 누구보다 더 처참하게 그레이스를 유린할 때, 근대적 인간형 곧 이성의 빛은 사망 선고를 받는다.

근대적 인간형에 사망선고를 내리다

사진/ 이수연 감독의 은 단란한 가정의 신화를 섬뜩하게 뭉그러뜨린다.
전지현, 박신양 주연의 <4인용 식탁>(8월8일 개봉)은 새로운 한국형 호러의 모범을 보여주지만 믿어 의심치 않았던 존재들, 예컨대 살가운 어머니, 어여쁜 아기, 화목한 가정에 결정타를 날린다. 모성애와 가족애의 신화에 심판을 가하려는 공격성에는 터럭만큼의 양보도 없다. 붉은 피를 보여주지 않고도 10명의 아이, 어머니, 아버지가 죽어가며 진짜 현실처럼 아파트에서 추락을 하는데, 그건 외면하고 싶은 우리의 진실이다. 호러와 미스터리는 그 진실에 약간의 당의정을 두른 처방일 뿐이다. 브레송부터 <4인용 식탁>까지 일련의 영화들을 보다보면 ‘인간성’이란 말 자체에 회의가 든다. ‘더 이상 인간은 없다’라는 식으로. 왜 이런 냉정한 시선이 필요할까. <4인용 식탁>의 이수연 감독은 여기서 새롭게 시작하자고 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날 것 그대로 보는 데서 진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한다.

이성욱 기자/ 씨네21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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