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열쇠말로 풀어본 현대미술 감상법… 독창적 어법이 대중과의 소통 가로막기도
서양 미술의 역사는 19세기까지 대체로 두 흐름에 따라 엎치락뒤치락 흘러왔다. 르네상스 고전주의처럼 옛 규범과의 조화를 따지는 형식 미술이 기본이라면 바로크, 낭만주의같이 개성과 감정을 중시하는 감성 미술이 번갈아 지배사조로 등극했던 것이다.
20세기 현대미술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런 구도는 깨져버린다. 산업화에 따른 사회격변과 자본의 세계화, 잇따른 전쟁, 혁명의 혼란 속에서 이성이 일군 고전미의 규범이 통째로 부정되고, 독창적 발상을 좇는 무한경쟁이 미술의 본질을 형성했다. 미술시장 또한 대형화하면서 ‘주목받고 싶다’는 작가들의 자의식이 팽창하고, 그네들 스스로가 사업가처럼 변신해갔다. 특히 1980년대 이후엔 첨단기술과 매체의 발달을 업고 작가들 누구나 자기만의 복잡다기한 언어를 고집해 교통정리조차 되지 않는다. 공유할 수 있는 미학적 가치가 희박해지다보니 현대미술은 더욱 어려워지게 마련이다. 미술평론가 이주헌씨는 “작가들이 지나치게 미술사의 맥락을 의식하며 제각각의 발언에 집착하기 때문에 미술은 전체로서 추동력을 상실했다”고까지 말한다.
요즘엔 미술 대중화 바람을 업고 소비자인 수집가, 관객의 목소리도 끼어들어 그 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각개약진식으로 자기 조형언어를 부각시키는 현대미술 작가들이 주로 고민하는 부분은 무엇일까. 때마침 8월 화랑가에는 이런 현대미술의 다기한 흐름과 어법을 엿볼 수 있는 작품마당이 적지 않다. 사진·영상·설치 장르를 중심으로 국내외 작가들의 다기한 조형성과 문제의식들을 풀어놓고 있는데, 현대미술의 흐름과 얽힌 네 가지 열쇠말로 전시들을 풀어보았다.
열쇠말 1
주무른 사진이 뜬다? 버린 자식 취급받던 사진은 80년대 이후 유력한 현대미술의 구세주로 등극했다. 대중이 선호하는 일상 속 풍경들을 ‘쿨’하게 잡아낼 뿐 아니라 연출사진, 이미지 조작 등 첨단 디지털 기법 등으로 보거나 찍는 방식에 혁신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머리를 써서 볼거리를 짜내어 찍는 ‘메이킹포토’, 보는 이를 풍경 속 현장으로 휘감는 즉물적 도시 근경사진들은 디지털 사진의 시대 도드라진 유행이다. 가나아트센터(02-720-1020)의 제3회 사진·영상페스티벌(8월31일까지)은 주무르고 다듬기 일쑤인 현대사진의 유력한 흐름을 보여준다. ‘금지’라는 전시 제목처럼 서구를 중심으로 한 12개 나라 주요 작가 20명의 근작 70여점은 대부분 촬영 때 배경 연출을 하거나 작품을 프린트, 현상하는 과정에서 손질을 가하는 등 ‘주무른’ 사진이 대부분이다. 이전 순수예술 사진의 금기는 간 데 없다. 딸과 가족들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뒤 컴퓨터로 색을 편집하고 잉크젯 프린터로 화폭에 출력한 아넬리스 스트르바의 작품은 정교한 색감의 반추상 유화그림과 진배없다. 컴퓨터 기술로 쿠바 도시 해안 풍경을 나긋하고 오묘한 회화풍으로 착색시킨 데지레 돌롱도 비슷한 맥락의 작업을 한다. 집이 공중을 날아오르는 합성사진을 쓴 피터 갓필드, 주거공간에 가득 채운 동물군상을 찍은 샌디 스코글런드는 연출과 조작의 대가들이다. 공사 중인 건축물의 정면을 회화적으로 포착하거나 건축부재들의 기하학적 결합형태에 초점을 맞춘 스테판 쿠튀리에나 프랑크 브로우어의 길쭉한 공장건물 작품 등은 사진 소재가 일상적 제약을 넘어섰음을 말해준다. 열쇠말 2 이제는 도시공간이 화두
일부 진보적 미술인들은 산업화한 현대 도시의 지리적 조건, 공간 환경에 대한 탐구로까지 관심을 넓혀가는 중이다. 슬럼가 등 도시의 문제지역을 활보하며 퍼포먼스를 하거나 이색 설치물을 놓고 정치적 메시지를 발산하기도 한다. 8월30일까지 서울 대학로 문예진흥원 마로니에 미술관(02-760-4726)에서 열리는 ‘공원 쉼표 사람들’전은 이런 맥락에서 겉돌던 미술관과 그 언저리 마로니에 공원을 통째로 전시소재 삼았다. 현대미술이 망각해온 장소의 역사적·사회적 의미를 일깨우려는 발상이다. 미술은 공원쪽으로 밀어내고 공원은 미술관쪽으로 들여온다는 엇바꿈식 기획틀이 돋보인다. 미술관을 내외로 관통하는 듯한 집 구조물(배영환), 미술관 벽체 한쪽면을 덮어버린 색띠(양주혜), 대학로와 공원의 옛 영화를 알리는 오디오 설치물(박주연) 등이 시민들에게 손짓한다. 반면 미술관 내부에는 오솔길 있는 인공 잔디공원(김승영)이 재현되고 1층에는 공원 안 잡탕 같은 인간군상들을 담은 대형 연작그림(최민화), 다른 시간대에 같은 공원 공간을 찍은 3D비디오 영상작업(정정화)들이 나와 공원 분위기를 만든다. “공원에서 어슬렁거리거나 죽치듯이 미술관, 작품을 활용하기 바란다”고 기획자 백지숙씨는 말한다.
열쇠말 3
과학, 진작 만날걸!
사이버아트, 키네틱아트 등 현대미술의 여러 흐름들은 기실 과학기술 발전에 따른 표현영역의 확대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럼에도 이해관계와 감성적 측면의 차이로 손잡기를 꺼려왔던 미술계에서 최근 상당수 작가들이 과학자와의 영상, 설치 협동작업에 나서고 있다.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10년 후…’전(8월24일까지)은 몇 안 되는 이런 합동작업의 결실이다. 한국과학문화재단과 카이스트가 가나아트갤러리와 함께 여는 이 기획전에는 첨단 영상기술과 로봇, 천체관측기술, 미디어아트를 응용해 다양한 과학 아트를 보여준다. 벽과 천장, 바닥이 모두 영상소통 기능을 지닌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유비쿼터스 라이프>(이동만, 박효진), 비닐·쇠붙이 파편들로 갑옷을 입힌 사람 형태의 휴먼형 로봇조형물 <도깨비>(장승효), 책장을 넘길 때마다 책 내용이 벽면에 나타나는 디지털 책(강애란·이상욱) 등이 눈길을 끈다. 02-736-1020.
열쇠말 4
나만의 눈, 나만의 세계
한국의 현대미술이 서구쪽의 흐름만을 획일적으로 추종하는 것은 아니다. 단절과 혼돈의 우리 미술사를 반영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특유의 여성성, 몽환적 세계를 배양하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 중견 큐레이터 박영택(경기대 교수)씨가 기획한 갤러리 라메르의 ‘어떤 낯섦’전(8월12일까지·02-730-5454)은 기묘한 그로테스크풍의 현대미술 작업을 해온 국내 작가 29명의 작품 모음이다. 볼 수 없는 내면 세계나 감정을 기괴한 몸 형상으로 시각화하는 비합리적 소통이 공통된 특징이다. 사람모양의 인삼이 염주를 달고 피와 땀을 흘리는 초상(김은진), 정육점의 고기 썰듯 토막나는 육체들(소윤경), 온갖 관능과 격정 따위를 담아낸 자궁 같은 원색의 유기질 덩어리(염성순), 머리를 덮은 달팽이·살을 물어뜯는 기괴한 애완동물(이순주) 등은 고통스런 꿈꾸기의 단면들이다. 한국 현대미술이 지닌 모방성과 장식 취향에서 벗어나 음울한 색조와 해체된 인간상, 유기체 덩어리 등 범주화하기 어렵고 낯선 환상미술을 보여주는 전시다.
몇 가지 열쇠말을 풀었지만 십인십색, 백인백색의 현대미술은 정답 없는 물음의 연속이다. 현대 작가들이 무엇을 회의하고 고민하는지 작업에서 물음을 발견하고 느끼는 것이 감상의 왕도다. 어차피 미술은 느끼한 일상의 관습을 툭 털고 나올 때 생기는 꿈을 먹고 사는 것이니까.
노형석 기자 | 한겨레 문화생활부 nuge@hani.co.kr

디지털 기술로 변형된 사진들은 현대미술의 주된 흐름 중 하나다. 가나아트센터 사진·영상페스티벌에 전시된 샌디 스코글런드의 (왼쪽)와 데지레 돌롱의 <하바나 리브르>.
주무른 사진이 뜬다? 버린 자식 취급받던 사진은 80년대 이후 유력한 현대미술의 구세주로 등극했다. 대중이 선호하는 일상 속 풍경들을 ‘쿨’하게 잡아낼 뿐 아니라 연출사진, 이미지 조작 등 첨단 디지털 기법 등으로 보거나 찍는 방식에 혁신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머리를 써서 볼거리를 짜내어 찍는 ‘메이킹포토’, 보는 이를 풍경 속 현장으로 휘감는 즉물적 도시 근경사진들은 디지털 사진의 시대 도드라진 유행이다. 가나아트센터(02-720-1020)의 제3회 사진·영상페스티벌(8월31일까지)은 주무르고 다듬기 일쑤인 현대사진의 유력한 흐름을 보여준다. ‘금지’라는 전시 제목처럼 서구를 중심으로 한 12개 나라 주요 작가 20명의 근작 70여점은 대부분 촬영 때 배경 연출을 하거나 작품을 프린트, 현상하는 과정에서 손질을 가하는 등 ‘주무른’ 사진이 대부분이다. 이전 순수예술 사진의 금기는 간 데 없다. 딸과 가족들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뒤 컴퓨터로 색을 편집하고 잉크젯 프린터로 화폭에 출력한 아넬리스 스트르바의 작품은 정교한 색감의 반추상 유화그림과 진배없다. 컴퓨터 기술로 쿠바 도시 해안 풍경을 나긋하고 오묘한 회화풍으로 착색시킨 데지레 돌롱도 비슷한 맥락의 작업을 한다. 집이 공중을 날아오르는 합성사진을 쓴 피터 갓필드, 주거공간에 가득 채운 동물군상을 찍은 샌디 스코글런드는 연출과 조작의 대가들이다. 공사 중인 건축물의 정면을 회화적으로 포착하거나 건축부재들의 기하학적 결합형태에 초점을 맞춘 스테판 쿠튀리에나 프랑크 브로우어의 길쭉한 공장건물 작품 등은 사진 소재가 일상적 제약을 넘어섰음을 말해준다. 열쇠말 2 이제는 도시공간이 화두

도시에 예술을 새긴다. 마로니에 미술관의 ‘공원 쉼표 사람들’전.

과학과 예술의 환상적 만남. ‘10년 후…’전에 나온 장승효의 <도깨비 로봇>.

내면과의 소통을 꿈꾼다. ‘어떤 낯섦’전에 전시된 이샛별의 <식은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