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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밥이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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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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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밥 한 그릇처럼 가깝고도 먼 것은 없어… ‘밥집 모시는 사람들’의 ‘진짜 밥맛’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갈라먹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이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먹는 것


1975년 3월, 국내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던 시인 김지하는 민청학련사건에서 인혁당 관련자들이 겪은 혹독한 고문 사례를 폭로한 ‘죄’로 중앙정보부에 다시 구속된다. 중앙정보부는 김지하를 영원히 제거할 목적으로 ‘가톨릭에 침투한 공산주의자’로 조작하는 한편, 김지하의 마지막 진술서를 ‘나는 공산주의자다’란 제목으로 5개국어로 번역하여 전 세계에 배포함으로써 국제적으로도 완전 매장하려 획책한다.

그러나 그해 5월, 김지하는 자기에게 들씌워진 터무니없는 공산주의자 모략에 저항하기 위해 몰래 감옥에서 집필한 원고지 100여장에 가까운 그 유명한 ‘양심선언’을 발표함으로써 박정희 독재정권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리고 이 ‘양심선언’은 사르트르, 보부아르, 촘스키, 몰트만, 카를 라너, 하버마스, 오에 겐자부로 등 세계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지지 서명하고 5개국어로 번역된 뒤, 그해 8월15일 일본·미국·유럽 세곳에서 일제히 전 세계 매스컴을 통해 발표되었으니, 이로써 수억원을 들인 중앙정보부의 공작은 폭삭 망하고 말았다.

‘양심선언’에는 김지하가 민청학련사건 당시 옥중에서 구상한 장시 <장일담>의 시작 노트에 얽힌 대목이 들어 있다. 백정과 창녀의 아들인 장일담은 도둑질을 하며 감옥을 들락거리다가 어느 날 득도, 혁명을 꿈꾸며 해동극락교를 선포한다. 그는 무리와 함께 마귀가 있는 서울을 향하여 ‘극락이란 밥을 나눠먹는 것’이며 ‘밥이 하늘이다’라고 선포하고 진군하지만, 이는 실패하고 배신자의 밀고로 잡혀 죽는다. 그는 한마디 변명도 없이 반공법·국가보안법·내란죄 등의 죄명을 쓰고 목이 잘리는데, 장일담은 이때 바로 위와 같은 ‘밥이 하늘이다’라는 노래를 부른다.

사진/ ‘밥집 모시는 사람들’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모시고, 손님을 식구처럼 모시고, 유기농 채소를 참생명이 스며 있는 먹을거리로 모신다.
사람에게 밥 한 그릇처럼 가깝고도 먼 것은 없다. 한민족에게, 전 인류에게 밥 한 그릇처럼 숱한 시비가 얽힌 것도 없으며, 밥 한 그릇의 그늘처럼 숱한 거짓말을 감추고 있는 것도 없다. 놀부에게 밥 한 그릇은 너무 흔해 빠졌다는 뜻에 가깝다. 그러나 밥 한 그릇의 고마움을 안다는 뜻에서 본다면 놀부는 밥 한 그릇에 대하여 멀며, 흥부는 가깝다, 놀부는 밥 속에 틀어박혀 살면서도 밥의 뜻을 모르지만, 흥부는 밥과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밥의 뜻을 안다. 밥은 도대체 어디서 생긴 것인가 밥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밥은 우주의 젖이다. 젖은 사람 몸의 곡식이요, 곡식은 천지의 젖이다. 사람은 우주의 논과 밭에서 자라난 밥을 얻어먹는 것이지, 요술쟁이처럼 곡식을 날조해내서 먹지 않는다. 밥 한 그릇은 하늘과 땅 사이에 맺힌 열매이며, 농부들이 땀으로 빚은 젖이다. 그러므로 밥 한 그릇을 마주 대하면 하늘과 땅의 놀라운 자연적 창조에 감사함과 아울러 농부들의 정성어린 노고에 보답해야 하는 것이다.

경기도 양평군 용문산 밑에 가면 경치도 좋고 인심도 좋고 음식맛도 좋은 ‘밥집 모시는 사람들’(031-774-8910)이 있다. 동학의 시천(侍天), 양천(養天), 체천(體天)에서 따온 ‘모시는[侍]’인데, 명함에 ‘밥대장 지광철’ ‘밥주인 남용미’라고 되어 있는 부부 모두 천도교 신자이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파괴하지 않고 모시고, 손님을 자기 식구처럼 정성들여 모시고, 유기농 채소를 참생명이 스며 있는 먹을거리로 ‘모시는 사람들’에 가거들랑 너무 밥맛에만 취하지 말라. 한번쯤은 어려운 우리 이웃들,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과 어떻게 밥을 나눠먹을 것인가 고민해보시라.

김학민 |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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