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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나이듦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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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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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의 계절이다.

예년과 다름없이 시댁식구들은 영광으로 내려오고 고추 한바탕 딴 뒤 물놀이도 갈 터이다. 영광으로 내려올 식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둘째아이와 함께 서울 친정집으로 휴가계획을 잡았다.

“바캉스가 별거더냐, 텅 비워버리는 것이지.” 그냥 마구 쉬고, 그동안 못 만났던 묵은 인연들 만나서 수다나 떨지 하는 마음으로….

번개같이 왔다간 잠만 자고 가던 딸이 일주일간 놀러왔다니 친정부모님 마음이 분주해지는 것 같다. 90살을 바라보는 할머니는 이만 없을 뿐 더 건강해지신것 같고, 엄마는 여전히 몸 재게 놀리며 활력 있어 보인다.

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70살까지 운전대를 잡겠다고 큰소리치시던 아버지는 2년 전 평생의 직업이었던 개인택시 운전대를 놓고 나니 부쩍 쇠약해지신 모습이다. 서울 친정집에는 90살과 68살, 63살의 노인 3명이 각각의 나이만큼이나 다르거나 또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둘째아들놈에게 왕할머니로 통하는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와 안 죽노”로 인사를 챙기신다. 아침 7시30분 아침식사를 하신 할머니는 각종 약으로 무장하시고 9시가 되면 노인정으로 출근하신다. 하루 종일 민화투로 소일하시고 50원 잃은 날은 속이 상해 오후 6시께 집으로 돌아오신다. “경로당에 나랑 동갑인 할마이가 3명인기라. 와 안 죽나 모르겠다”며 생과 죽음을 입에 달고 사신다.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이 급격히 나빠져 안과 치료를 받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며칠 함께 생활해보니 친정아버지의 증상은 심각했다. 그나마 많이 좋아져 텔레비전은 볼 수 있지만 거리의 큰 글씨들은 읽을 수 없단다. 자연히 바깥 출입을 꺼리고 매사에 자신감이 떨어질 수밖에….

평생 일밖에 모르고 사시다가 일을 놓으면서 생의 의미마저 잃고 힘들어 하신 시간이 꽤 길었던 것 같다.


행인지 불행인지 멀리 산다는 이유로 방황이 정리된 뒤에나 이야기로 전해 들은 아버지의 고통엔 혼자 살게 된 딸에 대한 걱정과 배려가 크게 녹아들어 마음을 뒤흔들어놓는다.

운동시간 외에는 바깥 출입을 않는 아버지 모시고 오랜만에 시내까지 나가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가자고 호들갑을 떨며 바깥에 나와보니, 무심히 지나쳤던 도로며 계단들이 노인들의 걸음을 힘겹게 한다. 내겐 항상 40~50대 청년 같던 아버지가 이젠 확연히 노인의 모습으로 새겨진다. “내가 살림 잘한데이. 깔끔 떠는 너거 엄마가 칭찬할 정도 아이가”라며 설거지며 청소를 해내는 아버지가 진심으로 가사를 즐겼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아버지가 일을 놓으면서 마음을 잡지 못하자 엄마는 이렇게 달랬단다. “평생 한눈 한번 안 팔고 일만 했으니 당신은 이제 고마 쉬이소. 그럴 자격 있고 이제부터 돈은 내가 벌어오꾸마.” 그리고 바로 직장을 다니기 시작했단다. 역시 ‘몸건강, 정신건강’한 울엄마다. “노인네 셋이 놀면 뭐하노. 몸 건강한기 복인기라. 그리 꿈쩍거려도 아프지 않은 게 복이지”라며 새벽밥 지어놓고 총총히 일터로 나간다. “느그 엄마 없으믄 우린 아무것도 몬하다.” 할머니와 아버지 두 노인네의 공통된 말이다.

친정부모라는 이유로 일주일간 3명의 노인에게 보살핌을 받는 동안 나이듦의 불편함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노인문제 멀리서 에돌아 생각지 말자. 내 부모의 일인 것이다.

오랜만에 오빠네, 동생네 식구들 불러들여 시끌벅적 한바탕 해야겠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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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댁 사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