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난 가족>으로 스크린에 컴백한 배우 윤여정, 그녀의 노후가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건 12년 전 스물네살 때였다. 그녀의 연기에 반해 있던 난 인사를 하게 됐다는 사실에 맘이 콩당콩당 뛰었고 날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서 “저 신애라 동기예요”라고 인사를 했다. 그녀의 대답은 날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 그냥 오지혜면 오지혜지 ‘신애라 동기’가 뭐니?” 쪽팔리고 무안하면서도 막연하게나마 무명 신인배우의 자존심을 존중해주는 것 같아서 너무 고마웠다. 그녀에게 말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마력에 가까운 매력이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난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이미 그 ‘꼼짝 못함’을 당한 사람이 됐던 거다. 영광이었다.
“체력이 달릴 때 가장 서럽다”
그녀의 초창기 시절 얘긴 전설처럼 들은 게 많은 데 비해 영화를 보기는커녕 사진 자료조차 본 게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이러고선 감히 팬이라고 우겼으니…. 인터넷을 뒤져봤다. 인터뷰 안 하기로 유명한 배우답게 정보의 홍수라는 인터넷도 그 정보의 근원지가 입을 다무는데야 별 수 없었나보다. 겨우 유명한 김기영 감독의 <화녀> 스틸 몇장을 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실례인 말이지만 난 그녀가 첨부터 ‘안 이쁜 여배우’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날 이해해줄 선배라고 생각했건만…) 동일인물인가 싶을 정도로 예쁘고 깜찍한 젊은 여배우의 모습이었다. 난 그녀를 보자마자 그 사진 얘길 했다. 옛날엔 너무 예쁘셨다는 말을 하면서 ‘옛날엔’을 강조하는 실례를 범했다는 사실은 집에 와서야 알았다. 후회해도 소용없으리…. 하지만 현명하고 재치 있는 그녀는 무안한 마음을 “그래 얘. 성형수술도 안 했는데 이렇게 됐어” 하는 유머로 까마득한 후배의 후진 싸가지를 너그럽게 받아줬다.
<바람난 가족> 얘길 했다. 처음엔 겁이 많이 났다고 한다. 방송은 ‘늙은이’들이 많지만 영화현장 가면 자기 혼자일 테니 아무도 자기랑 말을 하려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제일 컸다. 하지만 시나리오만 보고는 또라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한 임상수 감독을 비롯해서 모두들 똑똑하고 친절했고 생각보다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추억한다. 임상수 감독에 대해선 30년 전의 김기영 감독과 ‘사람 보는 눈’이 같은 감독이라고 느꼈고 벗는 거에 대해선 벗어봤자 피차 손해라는 생각에 별 거리낌이 없었단다. 오히려 제일 힘들었던 건 시나리오를 읽는 거였다고. 안 할 때 안 하더라도 왜 하기 싫은지를 확실하게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 꼼꼼히 읽긴 읽었는데 내용상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고, ‘고딩이’가 고등학생을 뜻하는지는 영화를 찍으면서 알게 될 정도로 생소한 말들이 많았다는 거다. ‘노인네’ 소리를 자꾸 해서 늙은 게 불쾌할 때가 언제인지 물었다. 젊은 애들과 작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 외모가 추해지는 건 오히려 별 상관이 없는데 체력이 달려서 밤 촬영을 하면 쌩쌩한 젊은 배우들에 비해 금방 눈에 핏발이 서고 혀가 굳을 때라고 한다. 나이 먹는 걸 즐긴다고 큰소리치고 다닌 난 그녀의 얘길 들으며 겁이 덜컥 났다. 나 역시 스무살 여배우들의 젊고 예쁜 얼굴이 부러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하지만 내공 빛나는 명연기를 보여주고 싶어도 체력이 달려서 몸이 말을 안 듣게 될 걸 생각하니 늙는다는 게 너무 서러울 것 같았다. 그래. 서러울 거다. 사람은 서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생각은 안 늙고 몸만 늙는다고 하지 않던가. 상상만 해도 너무 슬픈 일이다.
가장 화려했던 시절, 장희빈
<꼭지>라는 드라마에서 그녀가 뱉은 대사가 생각났다. 그녀는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편을 원망하면서 “이놈의 질투는 늙지도 않아”라고 혼잣말을 했다. 그녀의 너무나 진짜 같은 연기를 보면서 그녀의(혹은 그녀 배역의) ‘늙지 않는 질투’에 눈물이 날 정도로 연민이 느껴졌더랬다.
<바람난 가족>에서처럼 로맨스를 꿈꾸지 않느냐 물었다. 교통사고가 기다린다고 나더냐는 우문현답을 하면서 생기면 생기는 거고 아님 말고란다. 이번 영화를 하면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자기 얘길 써대는 바람에 자기 자신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본 게 처음이라고 했다. 기사를 보고서야 이혼했을 때 나이가 서른 중반밖에 안 됐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면서 “난 내가 이혼했을 때 내가 쉰아홉살인 줄 알았어”라고 말해서 날 또 한번 가슴 아프게 했다. 로맨스도 배부르고 등 따스워야 생기는 거지 그 당시엔 그저 애들을 어떡하면 굶기지 않는가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때 열심히 ‘거둬멕인’ 아들 둘은 지금 미국에서 커다란 패션회사 직원과 N.Y.U 학생으로 멋지게 사람구실을 하고 있다.)
그녀의 가장 화려했던 시절은 장희빈 때가 아닌가 싶다. (내 시엄마는 아직도 TV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70년대 초의 장희빈 얼굴이 겹쳐진다고 하신다.) 누가 장희빈을 했으면 좋겠느냐고 시청자에게 물어서 캐스팅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실감나는 연기에 넘어간 순진한 어르신들이 그녀를 때려주겠다고 단체로 방송사엘 몰려오는 바람에 박근형씨의 경호(?)를 받아가며 녹화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한 음료수 회사의 초대 모델로 전국의 담벼락마다 음료수병을 든 그녀의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장희빈 이후 포스터마다 그녀의 눈에 구멍을 뚫는 ‘만행’들이 저질러져서 고민을 하던 동아제약쪽으로부터 퇴출당한 일화도 있다. 도대체 얼마나 잘 했기에….
시사주간지는 보지 않지만 뉴스는 누가 검사라도 하는 것처럼 꼬박꼬박 본단다. ‘요즘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느낌이 궁금했다. 솔직함과 정직함은 분명 다른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안 듣고 싶은 말까지 너무 쉽게 한다는 거다. 솔직함의 미덕을 넘어 염치와 체면이 없어지는 것 같다면서 그래도 옛날 사람들은 비록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된다고 배워서 애써 에둘러 말하느라 촌스러웠을지라도 요즘 사람들보단 정직했던 것 같다는 거다.
연기말고 할 줄 아는 것? 줄담배…
나누고 사는 사회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화장유언은 백퍼센트 찬성이란다. 하지만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건 정말 안 하고 싶단다. 나서는 일은 사람들 시선을 받을수록 가증스러워지게 마련이며, 그런 사람치고 제대로 된 사람 못 봤다면서 좋은 일일수록 숨어서 조용히 해야 하고 내가 내 새끼 잘 키우고 내 부모 잘 모시고 연기 열심히 하는 것만도 자신은 숨이 턱에 찬다고 한다. 그러면서 세상 사람들이 다 각자 자기 맡은 일만 잘하면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믿는단다. 백번 맞는 말이다.
줄담배는 그녀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연기말고 할 줄 아는 것’이다. 그녀는 다른 ‘늙은’ 배우들처럼 노후를 위해 장사를 할 줄도 모르고 다른 어떤 잡기도 없다. 자기가 여태까지 해본 거라곤 연기하는 거랑 시집갔다 온(?) 거밖에 없고 앞으로도 이렇게 살다 조용히 가는 게 소원이란다. 난 그런 그녀에게 ‘교통사고’가 일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교통사고 같은 로맨스 말이다. 그래서 그녀의 노후가 쓸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의 진정한 팬으로서의 바람이다.
오지혜 | 영화배우

사진/ 스카이라이프 정용일
<바람난 가족> 얘길 했다. 처음엔 겁이 많이 났다고 한다. 방송은 ‘늙은이’들이 많지만 영화현장 가면 자기 혼자일 테니 아무도 자기랑 말을 하려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제일 컸다. 하지만 시나리오만 보고는 또라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멀쩡(?)한 임상수 감독을 비롯해서 모두들 똑똑하고 친절했고 생각보다 즐거운 경험이었다고 추억한다. 임상수 감독에 대해선 30년 전의 김기영 감독과 ‘사람 보는 눈’이 같은 감독이라고 느꼈고 벗는 거에 대해선 벗어봤자 피차 손해라는 생각에 별 거리낌이 없었단다. 오히려 제일 힘들었던 건 시나리오를 읽는 거였다고. 안 할 때 안 하더라도 왜 하기 싫은지를 확실하게 얘기해줘야 할 것 같아서 꼼꼼히 읽긴 읽었는데 내용상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많았고, ‘고딩이’가 고등학생을 뜻하는지는 영화를 찍으면서 알게 될 정도로 생소한 말들이 많았다는 거다. ‘노인네’ 소리를 자꾸 해서 늙은 게 불쾌할 때가 언제인지 물었다. 젊은 애들과 작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 외모가 추해지는 건 오히려 별 상관이 없는데 체력이 달려서 밤 촬영을 하면 쌩쌩한 젊은 배우들에 비해 금방 눈에 핏발이 서고 혀가 굳을 때라고 한다. 나이 먹는 걸 즐긴다고 큰소리치고 다닌 난 그녀의 얘길 들으며 겁이 덜컥 났다. 나 역시 스무살 여배우들의 젊고 예쁜 얼굴이 부러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다. 하지만 내공 빛나는 명연기를 보여주고 싶어도 체력이 달려서 몸이 말을 안 듣게 될 걸 생각하니 늙는다는 게 너무 서러울 것 같았다. 그래. 서러울 거다. 사람은 서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생각은 안 늙고 몸만 늙는다고 하지 않던가. 상상만 해도 너무 슬픈 일이다.

사진/ 오지혜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윤여정씨.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해 웬만한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는 편이다.(스카이라이프 정용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