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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키보이스는 깃발을 꽂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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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8-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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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록 음반 기원 논란]

극소수를 제외하곤 존재 자체도 알지 못했던 음반이 39년 만에 재발매됐다. 키보이스의 데뷔 음반 <그녀 입술은 달콤해>(오리지널 발매 1964년 7월 신세기레코드사 SL-10417, 재발매 2003sus 7월 레트로 뮤직 RMLP-0001)가 주인공이다. 재발매 음반이라 하면 보통 과거 음원을 되는 대로 편집해서 실은 CD를 떠올리기 쉽다. 이런 재발매 CD들은 대중음악을 흘러간 유행가에 머무르게 한다. 하지만 음악 애호가 박성서가 ‘발굴’해서 내놓은 이 재발매 음반은 재킷은 물론 마스터테이프로 만든 음원까지 원본 그대로다. 오기(誤記)도 수정하지 않아 ‘사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CD가 아니라 비닐 음반(LP)으로 1천장 한정발매한 것은 그런 맥락에서다. 그래서 음반을 들으면서 해설지를 읽다보면 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과연 명품일까. 미리 말하면 ‘그렇다’.

음반 재킷에 나오는 ‘한국의 비틀즈 Key Boys’라는 문구, 말쑥한 옷차림에 악기를 들고 있는 멤버들의 모습은 록 음악이 당시 한국 청년들에게 미친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노래와 연주를 겸하는 소그룹이 전기 악기를 사용해 증폭한 사운드 말이다. ‘노래는 가수, 연주는 악단’이 당연했던 시절, 고작 네댓명이 기타·베이스·드럼만으로 노래와 연주를 겸한다는 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점잖치 못하다는 기성세대의 곱지 않은 시선에 아랑곳 않는 ‘속된’ 음악과 태도 또한 마찬가지다.

사료로서 이 재발매 음반은 한국 록의 기원 논쟁을 다시 지필 듯하다. 그동안 한국 록 최초의 음반은 신중현의 록그룹 애드 훠(Add 4)의 데뷔작 <빗속의 여인>이라는 게 다수설이었다(64년 12월 혹은 65년 초에 발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박성서는 멤버들의 증언과 상세한 고증을 근거로 이 음반이 64년 7월에 발매된 한국 최초의 록 음반이라는 주장을 해설지에서 입증하고 있다. 키보이스가 그해 여름 한국방송에 출연해 신보 발표회 형식으로 연주했다는 것과 64년 7월3일자로 기록되어 있는 취입 카드 및 마스터테이프가 핵심이다. 아직은 하나의 주장이지만 물증과 근거가 만만치 않아서 ‘고수들’ 사이에서 벌어질 향후 토론이 흥미진진할 전망이다.

그런데 정작 음악 자체는 어떨까. 총 13곡의 수록곡 중 6곡이 창작곡이다. 그룹 멤버들의 자작곡은 아니고 당시 신예 작곡가인 김영광의 곡들이다. 하지만 키보이스의 음악이 구미 팝/록의 모방에 그쳤다고 알려진 통설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는 증거다. 물론 자작곡만으로 이뤄진 애드 훠의 음악과 비교하면, 키보이스 음반의 창작곡은 나머지 7곡의 번안곡과 거의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유사한 질감을 보인다. 전체적으로는 비틀즈를 비롯해 60년대 초반 ‘백인 청년’ 밴드들의 신선하고 풋풋한 사운드를 너끈히 따라잡고 있다.

한국 대중음악의 정사에서 64년은 ‘동백 아가씨(이미자)의 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음반을 보면 더 의미심장한 사건이 발생한 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키보이스와 애드 훠 같은 몇몇 선구자들에 국한되지 않는, ‘한국 팝’이나 ‘한국 록’이 태동하는 집단적 움직임이 있었다. 이는 단지 ‘음악’의 문제를 넘어 새로운 대중문화(청년문화)의 맹아였다. 이번 재발매 음반에 이어 키보이스의 다른 두 음반도 재발매될 계획이고, 다른 곳에서도 ‘잊혀진 한국 록 황금기’의 음반들이 속속 재발매될 예정이다. ‘키보이스 데뷔 음반의 재발매’라는 사소해 보이는 뉴스가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와 현재에 대한 진지한 탐구의 기폭제가 되길 기대해본다. 다시 한번.


이용우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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