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아들에서 중국 영화 황제로, 그 파란만장한 생애를 8년 동안 추적한 휴먼 다큐
20세기 초를 되돌아보면 한국인이 살아간 삶의 경계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음을 느낀다. 침략과 식민의 고통에 떠밀려, 또는 독립투쟁에 나서 떠도는 삶이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살았다. 그 뒤 수십년 동안 한국인들을 반도의 남부 ‘섬’에 가둔 이데올로기와 분단의 장벽이 쌓이기 전 한국인들의 삶의 무대는 훨씬 넓고 다양했다. 물론 거기에는 떠도는 이산(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야 했던 차별과 고통과 아픔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있었으리라.
김염(金焰), 진옌의 삶도 그랬다. 본명은 김덕린, 1910년 한성(서울)에서 태어난 조선인인 그의 집안에는 김규식, 김순애, 김마리아, 서병호, 서재현, 김필례 등 많은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있었다. 1930년대 중국에서 영화배우가 된 그는 출연하는 영화마다 최고의 찬사를 받은 ‘영화 황제’였으며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기억되는 전설 같은 배우다. <아리랑>의 님 웨일스도 “나는 김염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어떻게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중국에서는 또 어떻게 영화 황제가 되었을까.
외손녀가 3개국 누비며 방대한 자료 모아
<상하이 올드 데이스>는 그의 외손녀 박규원씨가 지난 8년 동안 작은 외할아버지의 발자취를 뒤쫓아 써내려간 기록이다. 결혼 뒤 오랫동안 가정주부로만 살아온 박규원씨는 우연히 친정 어머니의 낡은 짐 속에서 김염의 낡은 사진 몇장을 보고 가족들에게서도 잊혀진 이 할아버지에게 매혹돼 중국과 미국, 캐나다를 누비며 방대한 자료를 모았다. 그 자료들을 토대로 자신의 생각들, 한국과 중국 근대사의 사건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이 책을 완성했다. 서경석 목사 등 국내에 있는 친지들뿐 아니라 김염의 부인 친이(秦怡) 등 많은 중국 사람들, 미국과 캐나다의 친지들, 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씨 등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책을 쓰는 동안 눈 수술이 잘못돼 심한 어지럼증으로 고생하게 됐지만 쓰러질 때를 대비해 돗자리와 양산을 항상 들고 중국을 돌아다닌 집념이 담긴 글이다. 김염의 자취를 쫓던 지은이는 “김염의 화려한 삶 뒤에 불행한 역사와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정신적 고뇌에 매력을 느껴 대책 없이 이 일에 빠져들었다”고 말한다.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양의사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류되어 중국으로 망명해 만주 통화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지원하고 북만주에 조선인 이상촌을 건설하려 애쓰다 1919년 일본 밀정에게 독살당했다. 아버지의 모습은 훗날 영화배우로서 김염의 삶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김필순의 죽음 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고모와 고모부(김순애와 김규식)에게 맡겨진 김염은 1927년 친구들이 마련해준 뱃삯 7원을 가지고 상하이로 갔다. 이 화려한 도시에서 극장매표원 등으로 힘겹게 살아가던 그는 1929년 쑨유 감독에게 발탁됐고, 당시 최고의 여배우였던 롼링위(완령옥)와 주연한 <야초한화>(野草閑花·1932)의 성공으로 스타가 되었으며 이후 출연작마다 큰 인기를 얻었다.
이전의 영화들이 전통시대를 배경으로 귀족 남녀들의 사랑을 주로 보여줬다면 쑨유가 감독하고 김염이 주연한 영화들은 당시의 사회를 배경으로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삼았으며 항일정신을 담은 새로운 영화들이었다. “국공 갈등이 심했던 당시 국민당은 국민들의 항일 열망을 무시하고 공산당 타도에 열을 올리고 있던 때라 사람들은 국민당 정부조차 감히 나서지 못하는 항일운동을 영화가 선봉에 섰다는 것에 대해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김염은 국민당 정부의 예술정책에 항의하며 “배우는 부자들의 노리개가 아니다. 자신의 예술이 사회에 유용하도록 힘쓰고 항일 반제 투쟁의 힘이 되어야 한다”는 공개서한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 조선인 학교를 후원했으며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자신의 사진을 담은 브로마이드를 팔아 항일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을 맞아 친지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제2의 조국으로 중국을 선택했다. 그러나 중국 혁명 이후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신중국에서 상하이 영화제작소 부주임, 국가 일급배우로 활약하던 그는 1962년 위 수술을 받다가 사고를 당해 더 이상 영화를 찍지 못하게 됐고,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 동안 부인과 함께 수용소에 들어가 노동을 했다. 그동안 방치됐던 아들은 정신장애자가 되었고, 수용소에서 나온 뒤 투병생활을 하던 김염은 1983년 12월27일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다.
현대사 소용돌이 속에서 변방으로 밀려나
<상하이 올드 데이스>의 꼼꼼한 기록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김염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뿐 아니라 당시 독립운동에 나서 중국 땅에서 치열하게 살았던 조선 사람들의 이야기, 2차대전과 혁명이라는 거창한 역사 앞에 선 한 뛰어난 예술가의 생애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쉬운 문체와 무엇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빛 바랜 수많은 사진들이 훌륭한 자료가 될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은 민음사가 공모한 ‘올해의 논픽션상‘ 대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상하이 올드 데이스>와 함께 ‘논픽션상’ 수상작으로 뽑힌 다른 작품들도 다양한 주제와 탄탄한 완성도로 눈길을 끈다. ‘역사와 문화’ 공동 수상작인 안인희씨의 <게르만 신화, 바그너, 히틀러>와 <공자가 사랑한 나무, 장자가 사랑한 나무>, 휴먼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작 <사자의 서를 쓴 티베트의 영혼 파드마 삼바바> 등이다. 그 중에서도 게르만 신화가 바그너에 이르러 예술이 되고, 히틀러에 이르러 파국적인 현실이 되는 과정을 추적한 <게르만 신화…>는 독일의 신화와 역사, 음악, 미술, 심리학, 정치 등을 자유롭게 오가며 독일을 속 깊이 들여다보게 하는 또 하나의 흥미로운 작품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