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 정해경의 <섹시즘- 남자들에 갇힌 여자>]
미혼모라는 말은 있지만 똑같이 책임을 나눠야 할 미혼부는 없다. ‘가정적인 남자’라는 말은 있지만 ‘가정적인 여자’라는 말은 없다. 남자는 조금만 가사노동을 해도 대단하지만, 여자는 아무리 가사노동을 열심히 해도 당연할 뿐이라는 암시다. 남성형 거버너(governor)는 주지사지만, 여성형 거버니스(governess)는 가정교사 겸 보모다.
말이 여자를 차별한다. 너무나 오랫동안 남성을 기준으로 굳어진 말들은 무의식까지 뿌리를 내린 강력한 차별도구다.
언어학자인 정해경(37)씨는 <섹시즘-남자들에 갇힌 여자>(휴머니스트 펴냄, 1만5천원)를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내뱉는 말들, 신문기사나 법률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분석하면서 한국어뿐 아니라 지구상 대부분의 언어가 성차별적 가치를 통해 여성을 억누르고 있음을 드러낸다. “말의 세계에서 남성은 자유로운 주체지만 여성은 자유롭지 못하다. 남자의 말에 여성은 갇혀 있다.”
남녀(male and female), 소년소녀(boys and girls), 신랑신부(husband and wife), 자녀(sons and daughters) 등에서 보듯 남성을 드러내는 기표가 여성의 그것 앞에 위치하는 언어습관은 단순히 관습이 아니라 남자를 긍정적으로, 여자를 부정적으로 보는 가치판단의 결과다. 이는 단어가 부정적 의미로 쓰일 때는 순서가 역전되는 것에서 입증된다. ‘연놈’들과 ‘어미아비도 모르는 자식’의 ‘어미아비’, 동물을 지칭하는 ‘암수’, ‘비복’(婢僕) 등이 그러한 예다.
특히 여성 관련 단어는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여성의 외모나 성적 타락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영어에서 ‘man in the street’(거리의 남자)는 일반인·보통사람을 가리키지만 ‘woman in the street’(거리의 여자)는 창녀를 지칭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일상의 혁명’을 통해 언어가 평등의 도구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항상 대화를 통해 소통하려는 여성의 언어에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발견한다. “말을 차별과 배제의 수단이 아니라 평등과 관용을 실현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 ‘여성적인 말’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 ‘진정한 혁명’”이라고 그는 말한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그러나, 지은이는 ‘일상의 혁명’을 통해 언어가 평등의 도구로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며, 항상 대화를 통해 소통하려는 여성의 언어에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과 가능성”을 발견한다. “말을 차별과 배제의 수단이 아니라 평등과 관용을 실현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 ‘여성적인 말’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알아보는 것이 ‘진정한 혁명’”이라고 그는 말한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