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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명품이 뭐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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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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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과시욕과 순간의 도취에 빠진 사람들… 정말로 그들은 멋을 아는 것일까

얼마 전 결혼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 한 후배가 편집부에 놀러온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사무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어디선가 이런 팡파르가 울려퍼졌다. “어머, 00선배 시집 잘 가더니 샤넬 입고 오네요.” 웃자고 한 얘기였지만 확실히 뼈 있는 농담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 콧대가 그전보다 더 높아진 것 같다. 결혼 전에 ‘Suck’이라는 단어가 박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던 친구였는데 샤넬이라니….

여자들에게 샤넬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랫동안 로고 패션을 고수해온 이 명품 브랜드는 지구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가 이미지를 무지하게 젊게 만들어놓긴 했지만, 여전히 코코 샤넬이 유포한 ‘고상한 우아함’이 대명사다. 그런데 샤넬을 입는 순간 치졸하게 말로 거들먹거리지 않고도 자신이 가진 재력과 권력, 그리고 그것을 기반으로 한 고상한 취향을 한방에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샤넬 슈트를 자신의 유니폼처럼 즐겨 입었다는 <보그>의 전설적인 편집장 애나 윈터를 공공연하게 흉보던 <바자>의 편집장(역시 전설적인) 리즈 틸버리스마저 어리석게도 이런 고백을 하고 말았다. ‘샤넬 슈트를 입을 수 있다면 여자로서는 최고의 행복’이라는….

그것이 어디 샤넬만의 힘일까 구치, 프라다, 크리스찬 디올, 에르메스, 펜디, 루이뷔통, 비비안 웨스트우드, 마이클 코어스, 마놀로 블라닉 같은 디자이너 명품 브랜드에 중독되어 인생을 말아먹는 여자들이 어디 한둘인가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명품을 사들이며 진 카드빚을 갚아준다면 나이 많은 영감하고라도 결혼하겠다는 미모의 젊은 여자들이 ‘원조 결혼’이라는 대단히 획기적인 풍속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실제로 내 주변에도 그런 엄청난 배포의 소유자가 있다. 처음부터 ‘원조 결혼’을 목표로 한 건 아닐지 모르나 국내의 대표적 의류업체 ㅎ기업의 일개 디자이너였다가 ‘올 샤넬’ ‘올 이브생로랑’ 패션으로 그 집안의 며느리 자리까지 접수한 ㅎ양이 위자료로 억대 카드빚을 갚고 해외로 도피한 사건이 한동안 패션계를 술렁이게 했다.


아, 도대체 명품이 뭐길래∼. 명품이라고는 브랜드에서 선물로 준 티셔츠나 리본 쪼가리(리본에 방울을 달아 내 집 강아지 목에 걸어주며 명품이라고 생색내는 재미에)밖에 없는 나로서는 그 무분별한 소유욕의 근원을 진심으로 헤아리긴 어렵다. 아주 싼 것, 한순간 기분 좋게 즐기고 쉽게 버릴 수 있는 옷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더더욱 이해가 안 간다. 다만 에르메스 버킨 백을 사기 위해 신장 매매까지 고려한 적이 있다는 일본의 칼럼니스트 나카무라 우사기의 글을 읽으며 짐작만 할 뿐이다. “품질, 디자이너의 정신, 긴 안목, 이런 건 다 개소리다. 그냥 근사하게 보이고 싶은 거다. 과시할 수 있는 순간의 도취! 명품을 사며, 성공에 도취한 듯, 자신의 가치가 상승한 듯…. 그런 옷을 사는 날에는 또 착각에 빠져 초대받지도 않은 칸 영화제에 쳐들어갈지 모르는 나 자신이 두렵다.”

그런데 참으로 안된 얘기지만 진짜 패션 리더들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명품으로 중무장한 여자들의 감각을 별로 신용하지 않는다. 자기만의 방식대로 현대와 고대, 동양과 서양, 싼 것과 비싼 것 등을 믹스&매치 하는 사람들에게 ‘올 샤넬’식 코디법은 심지어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짜 오리지널리티는 디자이너가 만드는 게 아니라 그걸 입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김경 |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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