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와 함께 하는 예컨대 | 과학기술과 인권]
유성민/ 대전 보문고 2학년
얼마 전 <최유기 리로드>란 만화에서 ‘도플갱어’란 단어를 봤다.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자신과 그의 분신이 만나는 개념이었고, 자신이 그 분신을 보면 죽는다는 현상을 뜻하는 것이었다. 도플갱어 현상에도 죽지 않은 이는 ‘특수한’ 능력을 가진 자나 예언자뿐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과학기술이 이 도플갱어에 관해 아직 완벽한 설명은 못하고 있으나, 어쨌든 지금 이렇게 그것을 논할 수 있는 것도 다 과학의 성과다.
그럼 우리는, 비단 ‘도플갱어’뿐 아닌 여러 의문들을 찾기 위해 과학을 발전시켜야 하고, 시키는 것인가. 그게 근본 이유는 아닐 것이다. 과학이란 것은 자연현상의 원리를 규명하고, 이를 이용해 인간을 위하는 ‘인권의 실천’이다. 사실, 불의 발견으로 인간의 시대가 열린 이후부터 역사는 개시되었고, 이후 인간은 행복을 위해, 즉 ‘천부인권’을 위해 과학을 발전시켜왔다. 결국 과학과 인권은 발생부터 상호 연관된 관계라는 것이다.
일찍이 퇴계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했다. 이가 정신이고 기가 물질이라고 본다면, 과학과 인권의 관계는 상호 발생되었을 뿐 아니라, 서로 같이 발전해야 비로소 인간을 유익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 과학 없이는 현 인류의 문명과 인권이 결코 유지될 수 없음은 이를 다시 상기시킨다. 결국 인류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각자의 이상과 행복을 현실에 반영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과학과 인권을 서로 조화시키고 상호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사 이래 수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 모두는 ‘충돌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무수한 전쟁, 무수한 범죄, 개인의 충돌, 사회의 충돌, 문명의 충돌 등 무수한 ‘충돌’의 근본은 바로 20세기 중반 이후 격화된 인권과 과학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산업시대 이래 지난 몇백년을 서로 조화 속에 발전하지 않고 과학과 인권이 다른 속도로 각개약진한 것이 그 원인이다. 이제 인권과 과학이란 서로 발생된 ‘분신’들은, 서로 각자의 같은 얼굴을 참지 못하고 서로 죽이려 하고 있다. 인권을 빙자한 기술발전 저해, 과학을 빙자한 인권유린, 시민·환경·종교단체와 과학집단의 대립 사례는 세세히 열거할 수조차 없다. 최근 서울 강남구에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을 설치한 것도 과학이 인권을 빙자해 그것을 유린한 대표적 사례일 뿐이다. 인간의 생활, 특히 사생활은 사회인인 이상, 재화 몇푼보다도 훨씬 소중하다. 이것은 상대론이 아닌, 절대론이다. 그러함에도 이러한 우려를 간직한 채 ‘전횡’을 일삼는 과학은 인권과 나란히 설 자격을 상실할 뿐이고, 과학의 치명타는, 인권의 치명타로 연결된다. 이것은 루즈-루즈(lose-lose) 게임일 뿐이다. 과학과 인권은 호발(互發)했고, 이 둘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발달했다. 그 둘은, 인류역사의 몸(과학)과 정신(인권)이다. 그 두 가치는 사실, 여지껏 앞을 향해 달려온 무수한 인간 군상들을 ‘가치화’한 것이다. 즉, 이들은 우리 인류의 “가치화한 분신”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는 앞서 언급한 ‘도플갱어’ 현상에 의해 서로 멸종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인간은 ‘신’의 모사라거나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동서고금의 전통적인 인간관을 말하지 않아도,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다르다는 것을 모두는 믿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현재의 문명을 뿌리내릴 수 있었다. 도플갱어 이야기 중 우리는 ‘특수’한 예언자와 인물을 상기해야 한다. 그들은 도플갱어 현상에서 분명히 살아났다. <최유기>의 삼장일행이 그들의 도플갱어인 식신들을 이기고 한 말, “그것들은 어제의 나였을 뿐이야”라는 말을 상기해야만 한다. 우리 스스로는 모두 인간의 ‘다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우리 스스로 가치 충돌에 대해, 이 잠깐의 도플갱어 현상에 대해 명백히 이해하고 수긍한다면, 이것도 후세 인류의 추억이 될 것이다. 과학과 인권이 서로 충돌하고 대립하는 오늘의 모습을, 내일 서로 물러나 ‘어제의 나’를 일신하면, 즉 그 두 가치 중 어느 하나를 우선시하는 사람들끼리 상대를 존중하고 장기적으로 논의하고 인류발전을 생각한다면, 이런 서로의 가치에 대한 이해와 수긍을 위한 노력은 이 시점을 극복하고 조화를 이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남의 CCTV 설치가 대다수 주민들의 토론과정 속에서 사회적 합의하에 설치가 된다면, 그것은 분명 이 ‘조화’의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위도의 핵 폐기물 처리장과 새만금 문제 같은 경우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본다면, 그것이 대립과 갈등만으로 점철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유럽 최고의 대문호 괴테도 21세 때 자신의 도플갱어를 보았지만 80대의 나이까지 장수하였으며, 필생의 역작인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그가 도플갱어를 본 시기가 21세이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가치충돌의 시대’가 21세기임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계시적이다. 조화를 위해, 현상에 대한 이해와 수긍의 노력이 선행되면 도플갱어의 환각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미래를 위한 잠깐의 시련이야말로 인류를 위한 계시일지니.
[칭찬과 아쉬움] 서울 강남의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 설치 논란을 예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권의 조화’를 논하는 글 중 대전 보문고 유성민 학생의 글이 뽑혔다. 언뜻 보기에 상관없어 보이는 <최유기 리로드>의 도플갱어 현상을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권의 조화’에 연결해서 풀어나간 유군의 글은 서두부터 ‘어떤 내용일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환기력이 있다. ‘도플갱어’라는 열쇠말을 축으로 글의 결론까지 밀고 나간 구성도 힘이 있었다. 각 문장이 탄탄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논지의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일관된 구성과 논리적 글쓰기가 돋보였다. 그러나 글이 몇 가지 전제에서 출발해 당위로 건너뛰는 점은 아쉬웠다. “‘불’이라는 과학의 발견으로 ‘인권’도 시작되었(다)”는 부분이나, “과학이란 것은 자연현상의 원리를 규명하고, 그를 이용해 인간을 위하는 ‘인권의 실천’이다” 등은 논리보다는 당위에 가까워보인다. 왜 과학의 궁극적 목적이 인권의 실천에 있는지를 좀더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괴테를 예로 든 결론 부분은 이 글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21’이라는 숫자의 일치를 매개로 과학과 인권의 조화 가능성을 제시한 ‘상상력’은 발랄하다. 하지만 괴테가 도플갱어를 21살에 보았다는 사실과 21세기에 절실한 과학과 인권의 조화를 연결하기에는 논리적 연관성이 너무 헐거워보인다. 더구나 결론으로 쓰기에는 말장난 같은 인상을 줄 위험이 크다. 유군 글 이외에는 인천 대건고 최승두 학생의 글이 돋보였다. 최군은 영화 <매트릭스>의 디스토피아에 빗대어 과학이 인권을 외면할 때 닥쳐올 암울한 미래를 경고하였다. 환경운동에서 나온 개념인 ‘지속 가능한 개발’을 대안으로 제시한 점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유군의 글은 지나치게 단아해서 글의 재미가 떨어지는 점이 아쉬웠다. 이 밖에도 대부분의 글이 “과학과 인권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과학이 인권을 존중해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쉬운 결론에서 출발하고 있어 아쉬웠다. 쉬운 전제에서 출발한 글은 아무리 잘 써도 평범함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학생들의 ‘정답’ 써내기는 글마다 빠지지 않는 비슷비슷한 명작, 경구 인용에서도 엿보였다. 자신의 머리로 써내지 않은 글은 지루하고, 관습적인 인용은 고리타분한 법이다.

일러스트레이션 | 장광석
하지만, 유사 이래 수천년이 지난 오늘, 우리 모두는 ‘충돌의 시대’에 살고 있다. 무수한 전쟁, 무수한 범죄, 개인의 충돌, 사회의 충돌, 문명의 충돌 등 무수한 ‘충돌’의 근본은 바로 20세기 중반 이후 격화된 인권과 과학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산업시대 이래 지난 몇백년을 서로 조화 속에 발전하지 않고 과학과 인권이 다른 속도로 각개약진한 것이 그 원인이다. 이제 인권과 과학이란 서로 발생된 ‘분신’들은, 서로 각자의 같은 얼굴을 참지 못하고 서로 죽이려 하고 있다. 인권을 빙자한 기술발전 저해, 과학을 빙자한 인권유린, 시민·환경·종교단체와 과학집단의 대립 사례는 세세히 열거할 수조차 없다. 최근 서울 강남구에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을 설치한 것도 과학이 인권을 빙자해 그것을 유린한 대표적 사례일 뿐이다. 인간의 생활, 특히 사생활은 사회인인 이상, 재화 몇푼보다도 훨씬 소중하다. 이것은 상대론이 아닌, 절대론이다. 그러함에도 이러한 우려를 간직한 채 ‘전횡’을 일삼는 과학은 인권과 나란히 설 자격을 상실할 뿐이고, 과학의 치명타는, 인권의 치명타로 연결된다. 이것은 루즈-루즈(lose-lose) 게임일 뿐이다. 과학과 인권은 호발(互發)했고, 이 둘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끊임없이 발달했다. 그 둘은, 인류역사의 몸(과학)과 정신(인권)이다. 그 두 가치는 사실, 여지껏 앞을 향해 달려온 무수한 인간 군상들을 ‘가치화’한 것이다. 즉, 이들은 우리 인류의 “가치화한 분신”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류는 앞서 언급한 ‘도플갱어’ 현상에 의해 서로 멸종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인간은 ‘신’의 모사라거나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동서고금의 전통적인 인간관을 말하지 않아도, 인간이 다른 존재들과 다르다는 것을 모두는 믿고 있다. 그래서 인간은 현재의 문명을 뿌리내릴 수 있었다. 도플갱어 이야기 중 우리는 ‘특수’한 예언자와 인물을 상기해야 한다. 그들은 도플갱어 현상에서 분명히 살아났다. <최유기>의 삼장일행이 그들의 도플갱어인 식신들을 이기고 한 말, “그것들은 어제의 나였을 뿐이야”라는 말을 상기해야만 한다. 우리 스스로는 모두 인간의 ‘다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우리 스스로 가치 충돌에 대해, 이 잠깐의 도플갱어 현상에 대해 명백히 이해하고 수긍한다면, 이것도 후세 인류의 추억이 될 것이다. 과학과 인권이 서로 충돌하고 대립하는 오늘의 모습을, 내일 서로 물러나 ‘어제의 나’를 일신하면, 즉 그 두 가치 중 어느 하나를 우선시하는 사람들끼리 상대를 존중하고 장기적으로 논의하고 인류발전을 생각한다면, 이런 서로의 가치에 대한 이해와 수긍을 위한 노력은 이 시점을 극복하고 조화를 이뤄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강남의 CCTV 설치가 대다수 주민들의 토론과정 속에서 사회적 합의하에 설치가 된다면, 그것은 분명 이 ‘조화’의 선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위도의 핵 폐기물 처리장과 새만금 문제 같은 경우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본다면, 그것이 대립과 갈등만으로 점철되지는 않을 것이라 본다. 유럽 최고의 대문호 괴테도 21세 때 자신의 도플갱어를 보았지만 80대의 나이까지 장수하였으며, 필생의 역작인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그가 도플갱어를 본 시기가 21세이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가치충돌의 시대’가 21세기임은,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계시적이다. 조화를 위해, 현상에 대한 이해와 수긍의 노력이 선행되면 도플갱어의 환각은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미래를 위한 잠깐의 시련이야말로 인류를 위한 계시일지니.
[칭찬과 아쉬움] 서울 강남의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 설치 논란을 예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권의 조화’를 논하는 글 중 대전 보문고 유성민 학생의 글이 뽑혔다. 언뜻 보기에 상관없어 보이는 <최유기 리로드>의 도플갱어 현상을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권의 조화’에 연결해서 풀어나간 유군의 글은 서두부터 ‘어떤 내용일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환기력이 있다. ‘도플갱어’라는 열쇠말을 축으로 글의 결론까지 밀고 나간 구성도 힘이 있었다. 각 문장이 탄탄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논지의 설득력을 더해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일관된 구성과 논리적 글쓰기가 돋보였다. 그러나 글이 몇 가지 전제에서 출발해 당위로 건너뛰는 점은 아쉬웠다. “‘불’이라는 과학의 발견으로 ‘인권’도 시작되었(다)”는 부분이나, “과학이란 것은 자연현상의 원리를 규명하고, 그를 이용해 인간을 위하는 ‘인권의 실천’이다” 등은 논리보다는 당위에 가까워보인다. 왜 과학의 궁극적 목적이 인권의 실천에 있는지를 좀더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괴테를 예로 든 결론 부분은 이 글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21’이라는 숫자의 일치를 매개로 과학과 인권의 조화 가능성을 제시한 ‘상상력’은 발랄하다. 하지만 괴테가 도플갱어를 21살에 보았다는 사실과 21세기에 절실한 과학과 인권의 조화를 연결하기에는 논리적 연관성이 너무 헐거워보인다. 더구나 결론으로 쓰기에는 말장난 같은 인상을 줄 위험이 크다. 유군 글 이외에는 인천 대건고 최승두 학생의 글이 돋보였다. 최군은 영화 <매트릭스>의 디스토피아에 빗대어 과학이 인권을 외면할 때 닥쳐올 암울한 미래를 경고하였다. 환경운동에서 나온 개념인 ‘지속 가능한 개발’을 대안으로 제시한 점도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유군의 글은 지나치게 단아해서 글의 재미가 떨어지는 점이 아쉬웠다. 이 밖에도 대부분의 글이 “과학과 인권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과학이 인권을 존중해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쉬운 결론에서 출발하고 있어 아쉬웠다. 쉬운 전제에서 출발한 글은 아무리 잘 써도 평범함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학생들의 ‘정답’ 써내기는 글마다 빠지지 않는 비슷비슷한 명작, 경구 인용에서도 엿보였다. 자신의 머리로 써내지 않은 글은 지루하고, 관습적인 인용은 고리타분한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