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제의 참된 해결을 위한 강수돌 교수의 제안, 아이에게 꿈을 심어주는 작은 실천에 나서야
미국의 어느 학교에 인디언 아이들이 전학을 왔다. 어느 날 선생님이 “자 여러분 이제 시험을 칠 터이니 준비하세요” 했다. 백인 아이들은 필기도구를 꺼내고 책상 가운데에 책가방을 올려 짝꿍이 엿보지 못하게 하면서 준비를 했다. 그런데 인디언 아이들은 책상을 돌려 둥그렇게 모여앉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선생님은 “애들아, 시험 칠 준비하라고 그랬잖니?”라고 화를 냈다. 인디언 아이들이 말했다. “선생님, 저희들은 예전부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서로서로 도와가며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더 이상 교육부에 기대할 것은 없다
세 아이의 학부모이며 경영학을 가르치는 강수돌 교수가 <‘나부터’ 교육혁명>에서 들려주는 인디언 아이들의 시험 이야기를 잠깐 생각해보자. (한국의 교육이 망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는) 우리는 내 아이가 인디언 아이처럼 했을 때 과연 아이를 칭찬할 수 있을까? 왜 남들처럼 못하고 쓸데없는 짓 했냐고 화내지 않을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많은 학부모들은 학교에 대해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먼저 ‘거대한 공포’를 느낀다. ‘우리 아이가 공부 못하면, 교사에게 미움받으면, 왕따당하면 어떡하지.’ 반면 아이가 ‘공부 잘해서 출세해서 돈 많이 벌게 되리라는’ 도박성 기대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4천만이 입만 열면 교육의 위기를 말하고 교육개혁을 외치지만, 수능시험과 내신성적 산출방법을 아무리 뜯어고쳐도 교육개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강제하는 경쟁 시스템과 돈벌이를 위해 살림살이를 희생시키는 ‘돈벌이 패러다임’이 오늘날 교육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꼭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다양한 가능성을 발휘하며 살 수 있고, (부자는 못 되더라도) 인간적인 삶이 보장되며 안정적으로 일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떤 부모가 아이들을 ‘입시 기계’로 내몰겠는가? 그래서 그는 “제아무리 좋은 제안이 나와도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현실이 변하지 않으면 제안으로 끝나버릴 것”이라며 “교육문제를 제대로 풀어가려면 교육과 더불어 경제, 나아가 삶의 방식이 함께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또하나, “그 변화는 ‘나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은 일류대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교육부만 손가락질해서는 교육 악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노사관계학을 전공한 학자인 강 교수는 “노사관계 분야를 공부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한경쟁 속에서 괴로워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일류대에 입학하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겨우 절반만이 취업할 뿐이고, 취업한 사람들도 성과주의, 생산성주의, 경쟁력주의에 갇혀 발버둥치다가 퇴직한 뒤에는 병든 몸과 황폐화된 정신만이 남는다. 이 과정에서 현실의 교육과정은 인간을 ‘쓸모 있는 노동력’으로 개조하기 위해 개인의 욕구를 억압하고 개성을 파괴한다. “지금의 학교는 쓸모 있는 노동력을 양산해내는 공장, 교사는 그 공장에서 우수한 제품과 열등한 제품을 골라내는 노동자, 교장은 그 공장을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관리·감독하는 기업주, 학생들은 고유한 꿈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일개의 생산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상생의 원리에 따라 온전한 인격체로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바보를 만들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넓고 진지하고 끊임없는 배움, 그렇지만 행복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분야를 직접 찾아가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이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다음엔 스스로 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스승을 찾아나선다. 부모나 스승은 아이들이 어떤 재능을 갖고 있는지 관찰하고 도와주는 보조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경쟁’이 아닌 ‘상생’의 원리에 따라 온전한 인격체로서 생태적인 삶을 살아가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그가 말하려는 해법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장하는 강 교수 자신은 얼마나 실천하고 있을까. 그는 지난 1999년부터 충남 조치원 서당골에 직접 지은 귀틀집에서 노모와 아내, 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사람이 나면 서울로 가라’는 말이 있지만 이 가족은 과천에서 청주로 다시 조치원으로 옮기면서 자연과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는 직접 거름을 만들어 텃밭을 가꾸고, 아이들은 10리길을 걸어 학교를 다닌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놀이터이자 호기심의 대상이며 친구이다. 사람들은 강 교수에게 “이제 중학생이 된 큰아이는 (일류대에 보내기 위해)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보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아이는 대안학교로 갈 예정이다. 중요한 것은 결단과 작은 실천이다. 나부터! 지금부터! 여기부터!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나부터’교육혁명』 강수돌 지음, 그린비 펴냄
한국 사회의 많은 학부모들은 학교에 대해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먼저 ‘거대한 공포’를 느낀다. ‘우리 아이가 공부 못하면, 교사에게 미움받으면, 왕따당하면 어떡하지.’ 반면 아이가 ‘공부 잘해서 출세해서 돈 많이 벌게 되리라는’ 도박성 기대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4천만이 입만 열면 교육의 위기를 말하고 교육개혁을 외치지만, 수능시험과 내신성적 산출방법을 아무리 뜯어고쳐도 교육개혁은 일어나지 않는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강제하는 경쟁 시스템과 돈벌이를 위해 살림살이를 희생시키는 ‘돈벌이 패러다임’이 오늘날 교육문제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꼭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다양한 가능성을 발휘하며 살 수 있고, (부자는 못 되더라도) 인간적인 삶이 보장되며 안정적으로 일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어떤 부모가 아이들을 ‘입시 기계’로 내몰겠는가? 그래서 그는 “제아무리 좋은 제안이 나와도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현실이 변하지 않으면 제안으로 끝나버릴 것”이라며 “교육문제를 제대로 풀어가려면 교육과 더불어 경제, 나아가 삶의 방식이 함께 달라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또하나, “그 변화는 ‘나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은 일류대 강박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교육부만 손가락질해서는 교육 악몽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노사관계학을 전공한 학자인 강 교수는 “노사관계 분야를 공부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한경쟁 속에서 괴로워하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일류대에 입학하려고 그렇게 애쓰지만 겨우 절반만이 취업할 뿐이고, 취업한 사람들도 성과주의, 생산성주의, 경쟁력주의에 갇혀 발버둥치다가 퇴직한 뒤에는 병든 몸과 황폐화된 정신만이 남는다. 이 과정에서 현실의 교육과정은 인간을 ‘쓸모 있는 노동력’으로 개조하기 위해 개인의 욕구를 억압하고 개성을 파괴한다. “지금의 학교는 쓸모 있는 노동력을 양산해내는 공장, 교사는 그 공장에서 우수한 제품과 열등한 제품을 골라내는 노동자, 교장은 그 공장을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관리·감독하는 기업주, 학생들은 고유한 꿈을 가진 인격체가 아니라 일개의 생산요소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상생의 원리에 따라 온전한 인격체로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바보를 만들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넓고 진지하고 끊임없는 배움, 그렇지만 행복한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분야를 직접 찾아가면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이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다음엔 스스로 필요한 지식을 배우고 스승을 찾아나선다. 부모나 스승은 아이들이 어떤 재능을 갖고 있는지 관찰하고 도와주는 보조자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로운 개인들이 ‘경쟁’이 아닌 ‘상생’의 원리에 따라 온전한 인격체로서 생태적인 삶을 살아가며 행복을 느끼는 것이 그가 말하려는 해법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주장하는 강 교수 자신은 얼마나 실천하고 있을까. 그는 지난 1999년부터 충남 조치원 서당골에 직접 지은 귀틀집에서 노모와 아내, 세 아들과 함께 살고 있다. ‘사람이 나면 서울로 가라’는 말이 있지만 이 가족은 과천에서 청주로 다시 조치원으로 옮기면서 자연과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는 직접 거름을 만들어 텃밭을 가꾸고, 아이들은 10리길을 걸어 학교를 다닌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놀이터이자 호기심의 대상이며 친구이다. 사람들은 강 교수에게 “이제 중학생이 된 큰아이는 (일류대에 보내기 위해)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로 보내야 하지 않느냐”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아이는 대안학교로 갈 예정이다. 중요한 것은 결단과 작은 실천이다. 나부터! 지금부터! 여기부터!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