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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가끔은 책을 덮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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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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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휴가철이다. 신문마다 휴가 기간에 읽을 만한 책들을 소개하는 건 이미 오랜 관습이 되었다. 얼핏 생각에 고마운 일처럼 보이지만, 달리 생각해볼 구석도 없지는 않다.

소로는 <월든>에서 “필요하다면 강에 다리를 하나 덜 놓고, 그래서 조금 돌아서 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비용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다 어두운 무지의 심연 위에 구름다리 하나라도 놓도록 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이 구름다리가 비단 ‘책’만은 아니다. 소로는 책을 하나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책으로 대변되는 하나의 언어에만 몰두하면 다른 언어를 잊어버릴 위험이 크다고 경고한다. 그 다른 언어는 무엇일까?

여행지에서의 이상한 독서열

일러스트레이션 | 배미정
“나는 내 인생에 넓은 여백을 갖기를 원한다. 어떤 여름날 아침에는, 이제는 습관이 된 멱을 감은 다음, 해가 잘 드는 문지방에 앉아서 해뜰 녘부터 정오까지 한없이 공상에 잠기곤 했다. 그런 나의 주위에는 소나무, 호두나무와 옻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고독과 정적이 사방에 펼쳐 있었다. 오직 새들만이 곁에서 노래하거나 소리 없이 집안을 넘나들었다. 그러다가 해가 서쪽 창문을 비치거나 또는 먼 행길을 달리는 어느 여행자의 마차 소리를 듣고서야 문득 시간이 흘러간 것을 깨달았다. 이런 날에는, 나는 밤 사이의 옥수수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동남아 여행 중에 특히 서양인들이 틈만 나면 문고판 책을 읽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어렸을 때부터 하도 다른 나라와 독서열을 비교당해서인지 처음에는 당연히 부러움과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때론 나도 그런 이들을 흉내내서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도 애써 책을 꺼내들기도 했다. 나름대로 코리아의 명예도 조금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생각을 조금 달리하게 되었다. 애써 다른 나라에 여행을 와서까지 책만 본다? 어딘가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저 사람들은 이 낯선 풍물에 관심도 없다는 건가?


물론 책을 읽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읽어야 한다. 그러나 가끔은 책을 덮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책의 언어로만 모든 것을 재단할 때, 우리는 어쩌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생의 귀중한 비밀을 놓칠 수도 있다. 어린 시절의 소로가 밤 사이 옥수수처럼 쑥쑥 자랐던 것은 단지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방언’들에 어떤 편견 없이 몸을 맡기는 것도 성장의 한 비밀일 수 있다. 새의 방언, 꽃의 방언, 하늘과 강의 방언…. 하다못해 소로는 화차에 실려가는 찢어진 돛을 보고 그것들이 “겪은 폭풍우의 역사를 이 찢어진 자국들만큼 생생하게 그려낼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것들은 더 이상 고칠 필요가 없이 바로 인쇄에 들어갈 수 있는 교정쇄”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교훈도 책에서 얻은 것!

휴가철, 모처럼 책을 읽겠다는 데 힐난하는 뜻, 결코 아니다. 아니, 박수로 격려라도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때로는 이번 여름엔 이 정도는 읽어야지 하는 부담감마저 훌훌 털어버리고 온전히 자연에 몸을 맡겨보는 일탈도 감행해볼 일이다. 지리산 자락 의신 마을 앞 강가 복판에 엄청나게 큰 바위가 있다. 한밤중 거기에 올라가 큰대자로 누워보시라. 주먹만한 별은 쏟아지고, 당신은 조물주가 꾸민 생의 비의에 전율마저 느낄지 모른다.

책을 제대로 덮을 줄 아는 이는 아마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지 않을까 싶다.

[부기] 이런 ‘교훈’을 나는 어디서 얻었는가. 결국 책이다. 이번 여름에 한권의 책을 권한다면, 그건 바로 <월든>이다. 이런 허세, 용서하시라.

***다음호부터는 소설가 권지예씨의 글이 4주간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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