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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데아의 실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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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3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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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과학을 배우다보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을 자주 만난다. ‘힘’은 물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등장한다. 현실적으로 모든 물체는 힘을 받으면 크든 작든 변형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런 변형을 일일이 고려하면서 문제를 풀자면 너무 복잡한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분자가 회전하면 에너지가 생긴다. 이때 회전이 강하면 원심력 때문에 분자의 모양이 변한다. 그런데 이것까지 고려해 회전운동 에너지를 구하자면 식이 매우 복잡해짐에 비해 그 영향은 대개의 경우 그다지 크지 않다. 따라서 이때 원심력을 받아도 분자의 모양은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며, 이와 같은 가상적 물체를 ‘강체’(剛體)라고 부른다.

일러스트레이션 | 유은주
화학의 경우 고교시절부터 누구나 배우는 개념으로서 ‘이상(理想)기체’라는 것이 있다(이름에서 이미 가상적 개념임이 명확히 드러난다). 이는 기체의 부피가 온도에 비례한다는 법칙을 그대로 지키는 기체를 가리킨다. 이 법칙은 한여름에는 타이어의 압력이 증가한다는 일상적 예를 통해 쉽게 이해된다. 그러나 온도가 극단적으로 낮아지면 문제가 나타난다. 흔히 말하는 ‘드라이 아이스’는 이산화탄소가 영하 78도 부근에서 고체로 변한 것이다. 따라서 그 이하의 온도에서는 기체가 아니므로 이상기체의 법칙은 더 이상 적용되지 못한다.

이 밖에도 많은 예가 있는데 사실 가장 친근하기에 가장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예는 수학에서 찾을 수 있다. 잘 알다시피 중학교 때부터 배우는 기하학에는 점·선·면 등의 기본 용어들이 나온다. 이를 토대로 기하학의 수많은 정리가 세워지며 이런 정리들은 일상생활에 곧바로 이용된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는 정확히 ‘점’에 해당하는 존재가 없다. 물론 ‘선’이나 ‘면’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매끈한 보석의 표면도 현미경으로 확대해보면 히말라야산맥이 무색할 정도의 험한 굴곡이 나타난다. 이쯤에서 우리는 “현실 세계를 설명하는 데에 왜 비현실적 개념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떠올린다. 물론 이에 대해 비교적 간단한 답으로 만족할 수 있다. 비현실적 개념을 사용해서 현실적으로 큰 불편이 없을 정도의 답을 쉽게 얻어낼 수 있다면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과연 현실적 실체와 가상적 존재의 명확한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의문을 생각하면 문제는 사뭇 복잡해진다.

‘원자’를 처음 배울 때 우리는 “물질을 이루는 가장 작은 입자”라고 이해한다. 여기서 입자란 당구공처럼 동그랗고 딱딱한 물체라는 일상적이고도 현실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원자는 더 작은 소립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단일 입자가 아니다. 또한 소립자는 딱딱한 당구공이라기보다 물결과 같은 파동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런 기이한 성질에 비유될 만한 일상적 존재는 없다. 따라서 그 본질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이해는 벽에 부딪힌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감각에는 어딘지 모르게 허구성이 있는 셈이며 진정한 실체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플라톤은 유명한 ‘동굴의 비유’에서 이데아가 실체이고 현실 세계는 그 그림자가 동굴의 벽에 비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해 최초의 관념론자로 불린다. 과연 그의 철학적 명제가 과학적으로 해명될 수 있을지 앞날의 대답이 궁금해진다.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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