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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그들의 만화적인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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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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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와 함께 하는 예컨대 | 힘은 곧 정의인가]

장고은/ 원주여고 2학년

우리는 현재 힘이 곧 정의라고 생각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이 불의 의식은 법의 집행에 관한 설문조사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것 같느냐는 물음에 과반수가 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답했다. 법은 결국 강한 자, 힘 있는 자의 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국제 정세 또한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경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초일류 국가이다. 어느 나라, 어느 대륙도 미국에 대항할 만한 힘이 없다. 미국은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전 세계를 움직인다. 미국의 의도가 곧 국제 질서요, 법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결국 2001년의 9·11 테러를 불러일으켰다. 테러집단은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항하고 ‘정의’의 실현을 위해 테러를 일으켰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에 대해 또다시 힘의 논리를 앞세웠다. 미국 역시 ‘정의’의 수호라는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단행했으며, 악의 축 발언에 이어 실제로 이라크를 공격하고 북한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미국의 힘이 어떠한가를 전 세계에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 장광석
이러한 미국의 태도는 어렸을 적 보던 만화를 연상시킨다. 만화 속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선의 대리자로 표상된다. 그들이 싸우는 상대는 평화로운 세계를 파괴하고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악한 무리이다. 만화 속 주인공들은 ‘정의’를 외치며 합법적인 폭력을 동원하여 ‘악’을 물리친다. <세일러문>이라는 만화에서 주인공은 항상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외치며 상대를 공격한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수고로 악의 세력은 사라지고 세계는 아름답고 평화롭게 유지된다.

하지만 만화와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현실에서는 ‘선’과 ‘악’의 구분이 매우 어렵다. 사람이 어느 관점, 어느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문제의 성격은 180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테러라는 행위는 결코 옳지 못한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테러를 미국의 압제에 대항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미국의 부당성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행동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절대적인 악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러한 예를 우리의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안중근, 윤봉길 등의 의거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옳지 못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행동을 의롭다고 여기고 그들을 의사라고 추앙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민족의 독립이라는 정의를 위해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평가는 사뭇 달라진다. 그들은 일본의 민족 영웅들을 죽인 악독한 테러리스트인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현실에서의 선과 악의 구분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어떠한 이익을 주느냐에 달려 있고, 따라서 절대적이지 않은 그 구분은 무의미함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양면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절대적인 가치들은 인간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것들이다. 그 절대적인 가치들을 현실에서 실현하고자 할 때 물리적인 힘을 동원한다면 그 가치들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는 정의의 수호자가 존재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어느 누군가가 정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힘을 행사하는 순간 그는 다른 입장에서 보면 정의의 파괴자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피는 피를 부른다’라는 말이 있듯이 힘의 사용은 또 다른 힘의 사용을 유발한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를 많이 보아왔다. 숙청으로 시작된 왕권은 숙청으로 멸망했고, 혁명과 쿠데타로 성립된 정권은 또 다른 혁명과 쿠데타로 전복되었다. 미국이 테러를 당한 이유가 미국의 과도한 군사·경제적 힘의 남용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힘이 곧 정의라는 주장이 틀렸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힘이 곧 정의라면 그 정의를 실현하기는 매우 쉬운 것이다. 강한 힘으로 제압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세계는 평화를 유지할 것이고 사회는 정당하게 운영될 것이며 사람들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이 정의라고 주장하며 행한 행위에 의해 많은 것들이 파괴되었다. 개인의 행복은 물론이고 가정의 안녕, 사회의 안정,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까지 위협받게 되었다. 급기야는 그들은 그들이 행했던 ‘정의’에 대한 ‘불의’의 보복을 받게 되었다. 정의를 행함으로써 어느 한쪽이 피해를 받게 되는 것은 그것이 곧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힘은 정의가 아니다. 힘은 그 자체로도 정의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또 다른 힘의 사용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힘의 행사는 잠시 동안은 유효할지 모르지만 결국은 보복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만화는 만화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어떠한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사실을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의의 부재라는 의식은 정말 힘이 정의가 아닐까 하는 착각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힘은 바로 동물의 세계의 지배원리라는 것이다.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원리는 바로 그 힘에 의해서 드러난다.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는 다르다. 인간은 생각하는 능력인 이성과 불의를 부끄러워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이성과 양심에 의해 인간은 올바름, 즉 정의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공존, 번영과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힘이 곧 정의라는 생각이 아닌 상호존중과 조화가 곧 정의라는 생각이다.

[칭찬과 아쉬움]

‘힘은 곧 정의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보내온 글들 중 장고은 학생의 글을 골랐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힘은 정의다’라는 질문 안에 갇혀 ‘힘은 정의다, 아니다’라는 논리 틀로 글을 전개한 데 비해 장고은 학생은 입장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이는 힘의 상대적 성격을 지적한 측면이 돋보였다.

힘의 상대성을 지적하는 데 만화와 역사적 사실을 대비시켜 쉽게 풀어나간 점도 선정의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또 장고은 학생은 힘의 악순환을 미국과 테러단체의 예를 통해 알기 쉽게 설명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힘의 논리를 ‘믿게 만드는’ 왜곡된 여론환경을 비롯한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 언급했으면 더욱 정치한 글이 됐을 것이다.

본론의 참신한 시각과 풍부한 예시에 비해 서론과 결론은 미흡했다. 우선 서론이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지 못했고, 결론도 당위론에 그친 느낌이다. 특히 인간의 이성과 양심에 대한 낙관으로 끝나는 결론 부분은 불의의 풍토를 지적한 서론과 충돌할 뿐 아니라 힘의 논리가 판치는 현실을 생각할 때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오히려 동물과 달리 동족에 대한 대량학살인 전쟁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인간 이성의 양면성을 지적하고, 상호존중과 조화의 중요성을 부각시켰으면 더욱 설득력 있는 글이 됐을 것이다. 인간만이 저지르는 야만인 전쟁은 대부분 ‘정의’의 이름으로 미화된다.

장고은 학생의 글 이외에도 ‘힘은 곧 정의인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논지를 펼친 글이 적지 않았다. 서울 영동고 3학년 조준호 학생은 사회에 관통하는 힘의 논리를 우리 일상의 결과주의와 연결시켜 설득력 있게 논술했다. 짧은 단문으로 리듬감 있게 이어간 문장도 훌륭했지만, 글의 분량이 너무 짧아 아쉽게 선정되지 못했다. ‘생각되는 정의라야 산다’는 제목으로 글을 보내온 대전 보문고 2학년 유성민 학생의 글은 동서고금의 지식인들의 정의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폭력의 위험성을 적절히 지적했지만, 오히려 지나친 인용이 현학으로 비치기도 했다. 모든 학생들이 한결같이 ‘힘은 정의가 아니다’라는 논지로 글을 보내온 것도 아쉬운 점이다.



[글 주제] :
부모와 자녀 생명권

제헌절이었던 7월17일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는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가 자녀 3명과 함께 투신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 조사 결과, 이 가족은 생활비 조달을 위해 빚을 졌다가 이를 갚지 못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을 두고 “오죽하면 어머니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죽을 생각을 했겠느냐”며 어머니의 행동을 동정하는 의견과, “아이들에게도 독자적인 생명권이 있는데 부모라고 해서 그것을 함부로 뺏는 것은 살인행위나 다름없다”며 어머니의 행동을 비난하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과연 아이들의 생명권은 부모에게 주어져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부모라 해도 자녀 생명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밝히시오.(글 마감 7월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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