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과학’이란 말을 들으면 우리는 어딘지 딱딱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도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이란 말은 좀 낫다. 이 경우에 쓰이는 ‘과학’이란 말은 단지 ‘학문’이란 말을 대신한다는 뜻이 강할 뿐 본래적 의미로서의 자연과학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자연과학이란 말로 접어들면 사뭇 긴장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수학이란 말을 들으면 그야말로 숨막힐 듯한 답답함에 젖어든다.
이런 느낌은 자연과학 내지 수학의 한 속성인 ‘논리적 엄밀성’에서 유래한다. 인간사회에는 풍부한 융통성이 있어서 웬만한 실수나 잘못도 너그럽게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연과학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다. 조그만 오류도 허용되지 않으며, 모든 현상은 법칙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된다. 실제로 수학시험을 볼 때 숫자 하나, 부호 하나를 잘못 써서 틀린 답을 얻고 그 때문에 점수를 잃은 경험은 거의 누구나 갖고 있다. 때로 마음씨 좋은 선생님은 풀이 과정이 옳으면 점수를 주기도 한다. 하지만 선생님과 제자 사이의 ‘인간관계’에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 뿐 ‘수학의 세계’ 자체가 그 답을 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쯤에서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이란 글을 떠올려보자. 그 글은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로 시작된다. 그런데 끝 부분에서 그는 연적의 겉면을 똑같은 모양으로 뒤덮은 꽃잎들 가운데 유독 하나만 약간 옆으로 꼬부라진 것을 보고 ‘균형 속의 파격’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처럼 한 조각의 꽃잎을 꼬부리려면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다고 썼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진정한 예술품은 엄밀성과 자유(또는 여유나 파격)의 두 측면이 잘 결합되어야 함을 느낀다. 단순히 마냥 엄밀하고 완벽한 곳에는 기하학적 아름다움만 있을 뿐 인간적 멋은 깃들이지 않는다.
위에서 자연과학은 엄밀한 학문이란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자연과학의 한쪽 면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차분히 들여다보면 자연과학에서도 자유는 아주 소중한 가치란 점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수학의 경우 독일의 전설적 천재 수학자 칸토어는 “수학의 본질은 자유에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무한대에도 작은 무한대, 큰 무한대, 더 큰 무한대 등 ‘무한의 계단’이 무한히 이어진다는 점을 보임으로써 당시 수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또한 과학자들의 업적들에서도 놀라운 상상력과 창의력을 절감하게 된다. 성당 천장에 매달려 흔들리는 촛대를 보고 진자의 등시성을 떠올린 갈릴레이, 사과의 떨어짐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 가속과 중력의 효과가 같다는 점으로부터 중력장에서의 빛의 꺾임을 예언한 아인슈타인의 착상 등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엄밀성은 그렇게 얻어진 아이디어를 정식화하는 데 적용될 뿐, 정말로 중요한 아이디어의 획득 과정에서는 자유가 더 소중하다. 나아가 자연의 전개 과정도 그렇다. 엄밀하다고 보는 자연법칙들로부터 얼마나 다양한 아름다움이 꽃피는가?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능력도 그 앞에서는 빛을 잃고 만다. 어쨌거나 자연이 신의 예술이라면, 비록 미흡하지만 여러 학문은 인간의 예술이다. 그곳 모두에는 엄밀함과 자유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따라서 이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도 이와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ac.kr

일러스트레이션 | 유은주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