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남일 | 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 방기황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청년은 쿵쾅거리는 가슴을 어쩌지 못했다. 목덜미를 익힐 듯 따갑게 내리쬐던 땡볕도 더 이상 느끼지 못했다. 눈앞에 무엇인가 전혀 새로운 물상이 보이는 듯싶었다. 청년은 얼른 방안으로 들어갔다. 일기장을 꺼내 정신없이 쓰기 시작했다. 가슴속을 콱 메우고 있던 커다란 덩어리가 한꺼번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울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그것은 슬픔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아니면 그 이듬해 청년은 작가가 되었다. 생의 어느 갈피에 꽂힌 시 한편 시 한편이 생을 바꿨다고 말한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 생의 어느 갈피엔가에는 시 한편이 숨어 있을 것이다. 담 너머의 미래를 전혀 설계할 수 없었던 한 정치범은 대신 제 발 밑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기 전혀 다른 생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는 이미 갇힌 영혼이 아니었다. 지금 우리는 그가 느낀 그 기막힌 찰나의 감동을 <야생초 편지>라는 책을 통해 함께 느낄 수 있다. 지난해 나온 <푸른작가>라는 청소년 문예지에는 작가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학교 숲에서 파아란 하늘을 쳐다보며 엘리엇의 ‘푸루프록의 연가’를 외던 강은교, 보리밭길에서 우연히 주운 짝사랑 누나의 수첩에서 본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를 훔쳐 읽은 시인 박상률. 물론 책만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책이 없다면, 시가 없다면, 구량리역 작약꽃밭 앞에서 통학하는 누나들을 골려먹던 악동이 훗날 시인(이원규)이 된 사연을 어찌 들어볼 수 있으랴. 시집을 들여다본 지 오래되었다. 사본 지는 더더욱 까마득하다. 오늘, 시내에 나가면 모처럼 서점에 들러볼까나. 문득, 그때 나를 산사로 내몬 옛 애인이 그립다. 잘 살고 있을 것이다. 김남일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