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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회접시에 휘날리던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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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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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가 일본에서 사시미로 불리게 된 사연… 강구미주구리막회집의 투박하고 고소한 맛

일본인은 장수하는 민족이다. 특정한 장수촌이 있다거나 세계 최고령의 노인들이 많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일본 국민의 평균수명이 세계의 어느 나라들보다 월등히 높다는 것이다. 일본 후생노동성 발표에 의하면, 2002년 현재 일본 여성의 평균수명은 85.23살로 세계 1위이고, 남성의 평균수명은 78.32살로 홍콩에 이어 두 번째라 한다. 유아기나 젊은날에 질병이나 사고 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의 나이까지 넣어 계산하는 것이 평균수명이고 보면, 보통 일본 노인들의 경우 ‘살았다면’ 90살 정도는 산다고 예측할 수 있다.

사진/ 강구미주구리막회집의 상차림. 투박스럽지만 뼈째 씹히는 고소한 막회 맛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근래 들어 일본인들의 평균수명이 매년 0.2~0.3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암·뇌혈관 질환 등 고령자들에게 많이 발생하는 병에 대한 진단·치료 기술이 발달해 사망률이 낮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육식을 좋아하지 않고 밥, 된장국, 채소절임, 생선으로 구성되는 그들의 소박한 식단이 장수를 뒷받침해주는 요인이라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그 중에서 생선에 대한 일본인들의 선호는 유별나다. 일본 사람들이 식용으로 하는 생선은 600여종이 넘는데, 가장 맛이 좋고 싱싱한 것은 회로 먹고, 두 번째 가는 것은 구워 먹고, 세 번째로 그도저도 아닌 것은 졸여 먹는다. 회로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것은 도미로, 일본에는 도미에 대한 책도 여러 권 있다. 도미 다음으로 회로 즐기는 것으로는 넙치, 다랑어 등이 있다. 그외 대부분의 생선은 굽거나 졸여서 먹는데, 그 중에서 연어는 염장하고 청어는 햇볕에 말려 조리하며, 정어리는 구이를 한다.

지난호에서 이야기했듯이, 생선회는 일본에서 꽃피워 이제는 ‘사시미’라는 이름으로 세계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그 원형은 육고기 날것을 채로 썰어 먹는 중국 고대의 회(膾)에 닿아 있다. 회는 당나라의 문명과 함께 나라(奈良) 시대 이전에 일본에 유입되었는데, 육류를 싫어하고 생선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입맛에 따라 변용되어 생선회, 곧 사시미로 발전하였다. 우리나라는 중국·일본의 회 문화를 모두 받아들여 육고기이든 물고기이든 날것으로 먹는 것은 모두 회라고 하였고, 더 나아가 데치거나 날것으로 초장에 찍어 먹는 일체의 채소류 음식도 회라 한다. 그러면 생선회에 왜 ‘사시미’(刺身)이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일본의 중세 막부정권 시절, 오사카성의 영주인 어느 쇼군에게 멀리서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쇼군은 요리사에게 식사를 준비시켰는데, 요리사는 주인의 귀한 손님을 위해 지지고 볶고 최대한 실력을 발휘하여 진수성찬을 마련했다. 산해진미로 가득찬 상에는 10여 가지 귀한 생선으로 뜬 회도 올라왔다. 쇼군과 손님은 모두 보지도 듣지도 못한 생선회를 맛있게 먹었는데, 손님이 쇼군에게 물었다. “이 생선들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주인으로서 손님에게 대접한 음식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없었으니 쇼군이 무척 당황하였다. 이 상황을 눈치채고 요리사가 들어와 각각의 생선들의 이름과 회 뜨는 법 등을 자세히 설명하니 손님이 칭찬하여 쇼군의 체면이 살았다. 그리하여 요리사는 이후에도 쇼군이 생선 이름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맛을 즐길 수 있도록 묘안을 냈는데, 그것은 종이로 작은 깃발을 만들어 생선 이름을 쓰고 그 깃발을 생선회 접시에 꽂는 것이었다. 곧 ‘사시’는 ‘刺’이니 ‘찌르다, 꽂다’는 뜻이고 ‘미’는 ‘身’이니 ‘몸, 물고기·짐승의 살’이라는 뜻이므로, 생선의 살에 작은 깃발을 꽂았다 하여 생선회가 ‘사시미’(刺身)로 불리게 되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삼성역 근처에 가면 ‘강구미주구리막회집’(02-568-9430)이 있다. 막회란 울진·영덕 등의 동해안 포구에서 어부들이 갓 잡은 자연산 잡어들을 채썰어 초장에 버무려 먹던 음식인데, 그때그때 물 좋은 물가자미(미주구리)·청어·전어·한치·학꽁치·고동 등을 채썰고, 무채·무순·실파·부추·배·양파 등을 적당히 섞어 버무리는 것으로 모양과 맛을 발전시킨 것이 강구미주구리 막회다. 파르스름한 접시에 하얀 무채, 가지런한 생선회에 꽂은 형형색색의 작은 종이 깃발이 상징하는 일본적 미학의 ‘사시미’에 비하면 투박스럽지만 뼈째 씹히는 고소한 막회 맛은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김학민 | 학민사 대표·음식칼럼니스트 hakmin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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