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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대륙의 그늘이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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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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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젠성 작은 농촌마을 사람들의 인생역정… 역사의 소용돌이는 그들에게 무엇을 남겼나

중국의 공산혁명은 농민혁명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첨단으로 발전한 사회에서 노동계급에 의해 혁명이 일어날 것이며, 농민은 ‘문명 속의 야만인’ ‘역사 속의 시대착오’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역사적 현상이었다. 마오쩌둥은 초기 중국 공산당 내에서 힘을 얻었던 도시혁명론을 비판하며 중국의 현실에 맞게 농민들에게 호소함으로써 혁명에 성공했고, 대륙을 바꿔놓았다. 그러나 혁명 이후 중국에 대한 관심은 정치 지도자들과 도시 사람들에게만 집중됐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세계의 공장, 미국의 맞수로 떠오른 지금 중국의 농민들은 더욱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사람들의 관심은 화려한 상하이나 베이징에만 맞춰진다. 여전히 중국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중국의 농민들은 혁명 이후 어떻게 살았으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의 목소리는 어디에 있을까.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현대사 흐름 재구성

대륙에서 태어나 대만에서 자란 뒤 미국에서 활동하는 인류학자 황수민의 <린 마을 이야기>는 바로 이 질문에 답을 해준다. 그는 1984년과 96년 두번에 걸쳐 중국 동남부 연안 푸젠(福建)성의 작은 농촌마을인 린(林) 마을에 찾아가 그곳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였다. 특히 마을의 실력자이며 공산당 서기인 예원더(葉文德·예 서기)를 주인공으로 그와 주변 인물들의 인생역정을 통해 중국 현대사를 재구성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일본군의 점령,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토지개혁과 농업집단화, 대약진운동, 사청운동, 문화대혁명, 그리고 개혁·개방 등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개인, 나아가 한 마을이 사회주의 낙원이라는 유토피아와 극한적 절망을 오가며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이웃사람과 수다떨듯 시시콜콜 들려주며, 혁명을 매우 다층적으로 보여주는 신선한 기록이 됐다.


예 서기와 지은이의 만남 자체가 극적이다. 처음 린 마을을 찾아갔을 때 예 서기가 터무니없이 비싼 방값을 요구하자 지은이는 분노하며 ‘상종하지 말아야 될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예 서기가 울면서 찾아왔는데, 그의 아버지 무덤이 고의로 심하게 훼손된 것을 보고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예 서기는 무덤 훼손이 자손들을 해코지하기 위한 목적이라고 말하는데,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 지은이는 혁명 이후 정부가 ‘봉건적 악습’이라며 뿌리 뽑기 위해 노력해온 풍수나 조상숭배, 확대가족의 이상, 종교활동, 효 등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국인들의 고유하고 내밀한 어떤 것은 ‘혁명’의 뒤편에 조용히 숨어 있었다. 이 마을의 화려하게 칠해진 2층 집들이 자세히 보면 전통적인 양식을 감싸안고 있는 것처럼.

특히 남아선호를 둘러싼 정부와 인민들의 필사적인 줄다리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80년대 이후 중국 정부는 농촌지역에서도 한 가정에 한 자녀만 낳도록 강제하고 있는데, 이 책에도 정부가 강제 낙태와 단산수술 등에 나서자 이에 불만을 떠뜨리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대를 이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만은 아니다. 도시 노동자들은 은퇴 뒤 연금을 받는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노후 보장을 받지 못하는 농민들이 믿을 거라고는 아들밖에 없다는 현실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한 자녀 정책에 맹렬히 저항한다. 예 서기는 6살 때 ‘해방’을 경험했다. 중농인 그의 집안은 토지개혁의 영향을 별로 받지 않았지만 그는 마을의 지주와 부농이 하루아침에 몰락해 고통을 겪는 것을 보았다. “평생 소처럼 일만 했던 무지렁이 농사꾼”이었지만 장남만은 성공시키기 위해 그를 학교에 보낸 아버지 덕분에 그는 마을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두명 중 한명이 됐고 20대에 입당해 능력 있는 지도자로 살아왔다.

사진/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들. 류샤오치, 마오쩌둥, 펑전, 주더, 저우인콰이(오른쪽부터)
이처럼 성공한 당 간부이지만, 그는 혁명과 토지개혁에 대해 거침없이 쓴소리를 들려준다. “토지개혁 때 (우리 집이) ‘계급의 적’이 되었더라면 나는 입당은커녕 고등학교 진학도 하지 못했을 거고요, 반대로 우리 가족이 ‘빈농’으로 분류되었더라면 권력을 쥐고 다른 사람들을 학대하면서 끝없는 증오와 폭력의 순환고리의 한 부분이 되고픈 유혹을 받았을 겁니다. 가끔은 계급투쟁이라는 관념, 그리고 농민을 다양한 계급으로 분류하려는 시도 자체가 우리 정부의 근본적인 실수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집니다.” 대약진운동이나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도 그는 냉소적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우리가 대약진운동 기간에 했던 소모적이고 무의미한 일들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믿어지지 않습니다”라며 “문화대혁명의 광란을 보며 중국의 공산주의 운동이 하나의 역사적 과오가 아니었을까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충격적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공산주의를 포기한 사람은 아니다. 그는 지금도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체체제에 대해 흔들림 없는 지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사진/ 문화대혁명(1966~76)과 1989.6.4 톈안먼 사태(오른쪽)

물론 농민들이 얻은 것도 많았다. 확실히 혁명은 인민들의 일상생활을 엄청나게 향상시켰다. 대부분의 농촌 주민들이 교육·식량·의료시설·작업할당의 혜택을 받았다. 유교 질서에 따른 소규모의 느슨한 전통 촌락공동체는 중앙정부의 정책이 기층 단위까지 효과적으로 시행되는 국가문화를 만들어냈다. 마을 주민들은 매우 정치화되었고 국가 정치의 장으로 통합됐다. 이는 마을 사람들이 계속 정치활동에 참여해야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린 마을의 도처에 깔린 확성기에서는 매일 아침 6시부터 하루 3번 군가와 간단한 뉴스, 논평 등이 흘러나온다. “다른 개발도상국과 비교했을 때 중국의 농촌에서 이룩한 성장은 인상적이었지만, 일상적인 정치통제와 이데올로기의 주입, 당 노선에 대한 강제된 순응이 있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누리는 물질적 향상에 대한 과도한 대가인 것 같았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 혁명을 떠올리는 까닭

사진/ 농민화 <린뱌오와 공자 비판>(1973). 문화대혁명 시기 린뱌오와 공자를 비판하기 위한 산시성의 지역 대중집회를 묘사했다.
70년대 말 개혁·개방 이후 린 마을은 다시 거대한 변화를 겪고 있다. 잉여 생산물을 내다팔 수 있게 되면서 사람들은 부자가 됐다. 대만과 가까운 연안지방인 이곳에서 경제발전 속도는 다른 곳보다 훨씬 빠르다. 마을 원주민들은 1200명이지만 4천여명의 외지 노동자들이 들어와 일을 하고, 부유한 시람들은 유럽식 빌라를 본뜬 호화저택에 살며 대형 텔레비전 세트, 가라오케 기계, 에어컨, 외제 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빈부격차가 심해진 것은 물론이고 간통과 성범죄, 도박, 마약, 사기, 절도, 도난사고도 늘고 있다.

예 서기도 변했다. 그는 린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과거 혁명에 대한 향수도 버리지 않은 그는 시내의 단골 가라오케에서 흘러간 혁명가요를 부르고 젊은 여종업원과 술을 마신다. 땀을 흘리며 끝없는 계급투쟁을 노래하는 그를 바라보면서 지은이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아마도 중국 혁명의 마지막 장(章)일 것이다. 유토피아적 이상주의가 조용히 냉소주의와 기회주의로 대체되어버린 개혁 이후 중국에서 예 서기는, 시장 메커니즘과 경쟁이라는 무자비한 수레바퀴에 곧 짓밟힐 운명에 처해 있는 진정한 이상주의자 중 마지막 한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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