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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파도를 타고 문명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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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2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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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태의 번역으로 만난 근대 |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

조선의 소년들에게 장대한 희망 심어줘… 매혹적 모험에 숨겨진 폭력성은 도외시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11월1일은 1908년 최초의 근대적 잡지라 일컬어지는 <소년>(少年)의 창간을 기념해 제정된 ‘잡지의 날’이다. 이는 잡지사(史)에서 <소년>이 차지하는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실제로 대표적인 계몽사상가 육당 최남선(1890~1957)이 이끈 이 잡지는 ‘최초의 근대적’이라는 수식어를 충분히 감당하고도 남을 만큼 체제와 문체 그리고 내용의 측면에서 기왕의 잡지와는 확연히 구별된다. 열아홉의 나이, 청년 최남선은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잡지 <소년>과 ‘대한의 희망’인 ‘소년들’에게 바친다.

바다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가는 길


일러스트레이션 | mqpm 서영경
그리고 창간호 맨 앞에 ‘철……석, 철……석, 척, 쏴……/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로 시작되는 신체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싣는다. 이 새로운 형식의 시는 진시황과 나폴레옹까지 굴복시켜버린 바다가 ‘담 크고 순정한’ 대한의 소년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공륙’(公六)이라는 필명으로 최남선 자신이 직접 연재한 <해상대한사>(海上大韓史)를 비롯해 <북극탐색사적>(北極探索事蹟) 등 바다와 관련된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 바다와 바다의 이미지가 잡지 <소년>을 관통한다.

왜 바다였을까. 바다는 ‘야만’을 제압하고 길들이는 ‘문명’, 자유와 평등과 우애에 기초한 ‘선량하고 온화하며 신성한 진보’를 전파하는 통로이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을 보라. 뿐이랴, 문명세계의 극락 미국을 보라. 그리고 일본을 보라. 어디 바다를 경영하지 않고서, 바다를 통과하지 않고서 문명을 꿈꿀 수나 있겠는가. 그랬다. 바다는 ‘문명’이라는 거센 물결의 다른 이름이었다. ‘소년들’에게 이 물결을 헤쳐나갈 수 있는 담력을 키워주고 모험심을 북돋워주기 위해, 나아가 그들이 문명인이 되어 세계를 주름잡길 바라면서 <소년>은 바다의 이름으로 ‘대한의 희망’을 품으려 했던 것이다.

거센 바다를 헤치고 ‘문명의 왕국’을 수립하도록 소년들을 독려하기 위해서는 좌표가 필요했으리라. <소년>은 <해상대한사>와 함께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여행기>와 대니얼 디포(1660-1731)의 <로빈슨 크루소>(1719)를 연재한다. 특히 <로빈슨 무인절도표류기(無人絶島漂流記)>라는 제목으로 여섯번에 걸쳐 연재된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의미 있는 좌표가 되기에 충분했다. 온갖 역경을 뚫고 ‘생존게임’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는 로빈슨 크루소는 기존의 국가적 영웅들과는 그 성격이 판이한 평범한 개인이어서 각별한 매력을 지닌 인물로 다가왔을 터이다.

200자 원고지 약 170장 정도의 분량으로 초역(抄譯)된 이 작품의 연재에 앞서 편집자는 번역 동기와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우리는 장쾌한 것을 좋아하니 그러므로 해천(海天)을 사랑하며 우리는 영특한 것을 좋아하니 그러므로 모험적 항해를 즐겨하며 해천을 좋아하고 항해를 즐겨함으로 표류담·탐색기적 문학을 탐독하는지라. 금(今)에 이 성미는 나로 하여금 이 불세출의 기문자(奇文字) <로빈슨 크루소>를 번역하여 우리 사랑하는 소년 제자(諸子)로 더불어 한가지로 해상생활의 흥취와 항해모험의 취미를 맛보게 하도다.” 이리하여 ‘세계에서 가장 진기한 책’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문명의 파도를 타고 이 땅에 상륙한다. 번역자는 반문한다. ‘세계사의 거센 기운’ 바다를 마주한 ‘신대한의 소년’이 어찌 이 글을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대답한다. ‘결단코 없으리라.’

<소년>에 번역돼 연재된 <로빈손 無人絶島標流記> 첫 부분과 삽화. 원작자 대니얼 디포(오른쪽 위)와 번역자 최남선(오른쪽 아래)

낯선 풍경의 발견… 삶의 열정 일깨워

대니얼 디포를 일약 18세기 위대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바꾸어놓은 <로빈슨 크루소>는 쥘 베른의 <15소년 표류기> <80일간의 세계일주> <해저 2만리> 등과 더불어 근대 계몽기와 식민지 시기 소년들을 사로잡은 해상모험 소설이었다. 중산층의 안온한 삶을 거부하고 끊임없는 모험을 선택하는 로빈슨 크루소는 수많은 소년 독자들의 가슴을 휘어잡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근대 자본주의가 ‘지리상의 발견’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거니와, 새로운 세계 또는 낯선 ‘풍경’의 발견은 많은 사람들을 부추겨 바다로 내몰았고, 로빈슨 크루소의 삶의 역정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들의 모험은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물론 그들이 배에 싣고 간 것은 ‘돈이 될 만한’ 상품만이 아니었다. 선교사와 총 그리고 합리성이라는 자본주의의 이념을 함께 실어 날랐다. 바다가 있는 한 거칠 것이 없었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의 근대가 항구를 열어 서양의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첫발을 내디딘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그야말로 바다는 ‘재미의 주머니요 보배의 곳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바다는, 최남선이 <바다를 보라>는 글에서 예찬하고 있듯이, ‘가장 완비한 형식을 가진 백과사전’이자 ‘가장 진실한 재료로 이루어진 수양비결’이기도 했다. 소년들을 계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에 불타는 장수(將帥) 최남선은 소년들을 향해 바다로 나가라고 독려한다. “가서 보아라! 바다를 가서 보아라! 큰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넓은 것을 보고자 하는 자, 기운찬 것을 보고자 하는 자, 끈기 있는 것을 보고자 하는 자는 가서 시원한 바다를 보아라! 응당 너희들의 평일에 바라던 것 이상을 주리라!” 이런 바다를 어찌 바라만 볼 수 있겠는가.

<소년>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리라. 소년들이여, 바다를 통한 교역에서 돈을 벌어들인 로빈슨 크루소처럼, 브라질에서는 식민농장을 경영하여 거금을 손에 쥐었던 로빈슨 크루소처럼, 노예상태에서 탈출하여 절해고도에서 이성의 힘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 로빈슨 크루소처럼, 세계로 저 드넓은 세계로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모든 역경을 물리치고 제국을 경영하는 대영제국의 표상을 형상화한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 문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대한의 소년’들을 향한 일종의 웅변이자 복음이 되어 근대 계몽기 위태로운 조선땅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웅대한 바다, 근대적 상상력의 보고!

조선을 삼켜버린 로빈슨 크루소들

그 울림이 너무 커서, 아니면 바다(문명)를 향한 열정이 너무나도 뜨거워서였을 것이다. <소년>이 <로빈슨 크루소>에 잠복해 있는 폭력성을 읽어낼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은. 과학적 합리성과 기독교 신앙으로 똘똘 뭉친 로빈슨 크루소가 프라이데이를 ‘길들이지’ 않았던가. 야만인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총을 쏘아 잠재우고 그들을 ‘절대적인 군주이자 입법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장대한 자연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기꺼이 새로운 땅의 ‘영주’를 자처하지 않았던가. 로빈슨 크루소‘들’이 프라이데이‘들’의 땅 조선의 지배자가 될 줄을 그들은 몰랐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문명에 대한 믿음이 하도 깊어서….

정선태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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