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10대들은 '이박사'에게 환호하는가, 애드리브가 죽여서?
지난 7월21일 저녁,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한 클럽. 옆머리를 뒤로 넘긴 70년대식 장발에 빨간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은 가수가 탬버린을 들고 무대에 등장했다. “문화예술을 사랑하는 학생 및 신사숙녀 여러분, 이박사의 스테-지에 와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가수는 노래를 시작했다. ‘신고산이 우르르르∼’로 시작해, <하이스쿨 록큰롤>, <영맨>(빌리지 피플의 ‘YMCA’ 개사곡), <몽키 매직>, <새타령> 등 8곡 정도가 쉼없이 나오면서 그 사이에는 ‘우리리리히’, ‘얼씨구’, ‘좋아좋아’, ‘미쳐미쳐’, ‘오예’, ‘이히’, ‘앗싸’ 등 추임새가 끊이지 않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관객은 머리와 몸을 흔들며 열광했다. 마지막으로 대표곡인 <나는 우주의 환타지>를 부르자 관객은 방방 뛰며 자지러질듯 소리를 지르고 환호했다. 공연이 끝나자 팬들은 실내의 후끈한 열기에도 아랑곳않고 사인을 받기 위해 길게 줄을 늘어섰다.
신바람 이박사(본명 이용석·46). 160cm. 45kg의 작은 체구에, 마이크만 잡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뽕짝 메들리’를 줄줄 꿰는 이 가수가 요즘 장안의 화제다. 홍대 앞 물좋다는 클럽가에서 상종가를 치고 있을 뿐 아니라 각종 인터넷사이트에서는 팬클럽과 팬들이 만들어놓은 비공식 홈페이지가 10개를 넘었다.
일찍이 카드라이브 뮤직계를 평정하다
이박사가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올 봄. 96년부터 98년까지 일본에서 활동하던 이박사가 현지에서 낸 음반을 팬들이 인터넷에 MP3로 올리면서 통신을 통해 빠르게 팬을 확보해갔다. 이 인기를 감지한 한국 소니사는 발빠르게 이씨와 전속계약을 하고, 일본서 냈던 음반 가운데 히트곡들을 모아 7월 말 국내 첫 라이선스 음반 <李博士-Space Fantasy>를 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 음반이 이씨의 국내 데뷔 앨범은 아니다. 이씨는 일본에서 발표한 6장의 앨범을 제외하고도 89년에만 19개의 이른바 ‘관광버스 뽕짝 디스코 메들리’ 카세트 테이프를 발표해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면서 일찍이 카드라이브 뮤직계를 평정한 중견가수다.
“국악을 하셨던 아버지가 환갑 때 내가 태어났어요. 어머니도 소리하면 빠지지 않는 분이니 끼를 이어받고 태어난 거지. 내가 아직 갓난아기 때 아버지가 객사하는 바람에 집안이 어디가 찢어지게 가난했어. 그래서 중학교꺼정 마치지도 못하고 공부는 땡쳤지. 그때부터 아이스께끼 장수부터 요정 보이, 양복점 시다, 자장면 배달, 다방 주방 심부름, 구두닦이, 안 해본 게 없을 정도야.”
10년 동안 14개의 직업을 전전하면서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 두번 망했던 양복점이 슬슬 자리를 잡을 때쯤 그의 잠자고 있던 끼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양복점도 그럭저럭 되기 시작하니까 또 재미가 없어지더라구. 그때 마침 누가 관광버스 안내원을 하면 노래도 실컷 부르고 돈도 잘 벌 수 있다는 거야. 78년 가을부터 관광버스를 타기 시작했지. 인기 폭발이었어요. 그런데 매일 새벽 5시부터 11시까지 버스를 타려니 이 약골이 배겨나야 말이지, 그래서 그만둬야지 결심해도 손님들이 ‘올 가을에 또 보자’며 예약을 하고 가면 마음적으루다가 또 흔들리고 그러면서 11년을 버스 손잡이 잡고 보낸 거야.”
운명을 바꾼 일본 소니사의 픽업
신청곡을 단 한곡도 놓치지 않고 줄줄이 꿰는 그에게 승객들은 ‘이박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자유자재로 애드리브를 구사하고 온갖 추임새를 넣는 그의 노래 스타일도 이때 ‘팬 서비스’차원에서 개발한 것. 그러던 어느 날 한 친구가 테이프를 한장 내자고 권유해 전자 건반 하나 놓고 두 시간 만에 녹음한 것이 <신바람 이박사>. 이 데뷔앨범이 100만장 이상 팔리면서 연이은 후속타가 그를 카드라이브 뮤직계의 황제로 등극시켰다.
“돈 벌었냐고? 아유, 그쪽 업계가 그렇잖아. 얼마나 팔리는지 잘 모르고 나도 뭐 인세니 이런 거 잘 모를 때니까, 한번 녹음할 때 100만원도 받고, 500만원도 받고 그러면 끝이지, 또 아는 형님이 돈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냥 해줘야지.”
25개의 테이프를 내고 약 9할대의 타율을 자랑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생활에 쪼들려 회갑잔치나 카바레 밤무대를 전전하며 96년까지 고달픈 무명 시절을 보냈다.
96년 일본 음반업계 최고자리에 있는 소니사의 픽업은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단순 경쾌하고 코믹한 그의 노래에서 테크노적인 가능성을 발견한 소니쪽의 계산은 맞아떨어졌다. “난 테크노가 뭔지도 몰랐지. 그런데 젊은 언니들과 학생들이 막 까무러치고 난리야. 우리나라에서는 뽕짝이라면 저질 음악이라고 무시하잖아요. 그런데 학식 높은 대학생들꺼정 따라하고 그러니까 기분 묘하면서도 좋데.”
96년 3월 국내 민요와 디스코 음악을 개사해 한국어로 녹음한 <이박사의 뽕짝 디스코 파트 1&2>와 4월 발표한 <이박사의 뽕짝 대백과>가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세종문화회관에 해당하는 무도관에서 공연을 해 1만여 관객로부터 우리말로 “사랑해요, 이박사”라는 환호를 듣기도 했고, 일본에서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후지TV의 음악프로그램 <헤이, 헤이, 헤이, 뮤직캠프>에 몇년 전 출연했던 다이애너 로스 이후 외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출연해 라이브를 했다. 덴키 그루브 등 인기 그룹과 함께 음반 작업도 했다. “3년 동안 정말 원없이 활동했어요. 텔레비전이랑 잡지에도 많이 나오고. 그리고 98년에 한국에 돌아와서는 다시 효도잔치, 회갑잔치에 다니기 시작했지. 다시 동네 가수하기 섭섭하지 않았냐구? 아니 손님들이 즐거우면 되는 거지, 내가 회갑잔치 나가면 어르신들한테 얼마나 인기가 좋은데.”
그는 자신이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도 지난 5월에야 알았다고 한다. “지난 5월10일, 친구한테 전화가 왔어. 스포츠 신문에 내가 나왔다고, 그때 신문보고 팬클럽이 있다는 사실도 첨 알았지 뭐야.”
황당무계하고 코믹한 노래말
그에 대한 음악인들의 관심은 좀더 오래 됐다. 올 초 개봉되었던 영화 <거짓말>에서 테크노 사운드와 함께 반복되던 남자의 목소리 ‘나는 육체으(의)환타지’는 언더그라운드 뽕짝 가수 볼빨간이 이박사의 <나는 우주의 환타지>를 패러디한 노래 <나는 육체의 판타지>를 테크노 DJ 달파란이 샘플링한 것이다.
뽕짝이라면 관광버스나 유원지에서 술취해 몸을 흔드는 아줌마, 아저씨의 주책이라고 생각하던 10대들이 왜 이박사에게 환호할까? “신나고 재미있어서 좋대. 애드리브가 죽인다고도 하고, 그리고 ‘키치’라고 하나, 왜 촌스러운 거 좋아하는 거 있잖아, 내가 반짝이 구두 신고 나가서, 탬버린 치고 ‘우리리리히’ 호루라기 소리내면 그냥 다 넘어가.”
‘꽃다발을 품에 안고 은하수와 달과 별을 사랑하는 혹성들(좋다, 허!)/ 우주끝까지 도망가도 마누라는 계속 나를 쫓아와(얼씨구)’(<나는 우주의 환타지> 중) 등 이씨가 직접 쓰는 황당무계하고 코믹한 노래말 역시 경쾌함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을 매료시키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특별히 최고나 1등이 되고 싶은 욕심같은 건 없어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노래할 때 박수 많이 받으면 그게 최고라고 생각해.”
인터뷰를 마친 뒤 이박사는 ‘제목’은 잘 모른다는 홍대 앞 어느 클럽을 향해 빗길을 헤쳐나갔다. 몸체보다 더 큰 가방에는 5년 동안 분신처럼 가지고 다니면서 해진 이곳저곳을 철사로 얽어놓은 탬버린이 들어있었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사진/7월21일 압구정동 클럽 셰도우에서 열린 이박사 공연. 노랑머리, 붉은 머리 20대 젊은이들이 '뽕짝 메들리'에 열광했다)

(사진/국내 첫 발매하는 에서 이박사는 테크노 밴드 가재발과 호흡을 맞췄다)

(사진/공연이 끝난 뒤 팬들에게 사인을 하고 있는 이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