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에 무대에 오르는 한국 포크의 1세대… 청년문화 공간 ‘청개구리’ 부활에 나서
1970년대 한국 포크의 대모 방의경이 돌아온다
“7월20일 서울 명동 YWCA회관 콘서트홀에서 ‘청개구리’ 부활을 알리는 방의경의 콘서트가 열린다.” 요즘 세대에겐 암호처럼 들릴 이 은 문장은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그런 공연 정보의 하나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남다른 사연과 추억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글일 것이다.
방의경(55)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가 남긴 음반은 1972년에 나온 독집 음반 한장과 <우리들>이라고 알려진 ‘옴니버스 음반’ 한장 정도다. 그런데 중고 음반시장에서 이 음반들은 부르는 게 값이고 그나마 ‘물건이 없어서 못 파는’ 상태다. 그가 지난 6월29일 ‘청개구리 부활을 위한 공연’ 무대에 30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이 공연의 많은 주인공들 가운데 가장 많은 갈채가 그에게 쏟아졌다. 왜 일부의 사람들에게 그는 그토록 소중한 존재일까.
전설로 남은 진정한 싱어송라이터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70년대를 대표하는 포크 가수들 대부분이 번안곡을 통해 사랑과 낭만을 노래할 때 그는 자기가 직접 만들고 연주한 곡에 사회와 자연에 대한 생각들을 담았다. 그를 빼면, 70년대에 자기 곡으로 음반을 채운 사람은 없었다. 천하의 김민기 독집 음반(대도 EU-716, 1971)에조차 한대수가 만든 한곡과 번안곡 한곡이 실려 있었다. 방의경은 70년대 한국 포크음악의 진정한 싱어송라이터였다. 그에 대한 전설이 단지 가사가 저항적이라는 이유로 그의 음반 <내 노래 모음>에 대해 판금 조처가 내려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방의경의 공연과 함께 재개관하는 ‘청개구리’의 의미 역시 되돌아볼 만하다. 방의경이 젊음을 불태웠던 청개구리는 70년대 한국 포크음악사를 거론할 때 반드시 순례해야 할 중요한 공간이었다. 옛 문헌과 경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70년 6월29일 명동 YWCA 안뜰 단층 건물에서 문을 연 청개구리 홀은 바닥, 벽, 천장이 모두 초록색이었다. 50~60여평쯤 되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했고, 얕은 높이의 무대에는 제대로 된 마이크도 없었다. 그렇지만 통기타 소리와 더불어 아무나 사회자가 되고 누구나 가수가 되었던 곳이다. 저녁 7~9시에 영화나 연극 감상, 포크송 ‘싱얼롱’(따라 부르기), 해설이 곁들여진 팝송 혹은 클래식 감상, 명사의 강연, ‘댄스’같이 요일별로 다른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이런 정규 프로그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100원의 입장료를 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개방되었다는 점이다. 오갈 데 없는 청춘군상이 아무 때나 들르던 이곳은 ‘포크’, 나아가 70년대 청년문화의 약호였다. 청개구리의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을 딱 둘만 꼽으라면 서울대 미대생이었던 김민기와 이화여대 미대생이었던 방의경일 것이다. 양희은이 직접 언급했듯 이곳은 “재수 시절 들렀다가 영혼을 사로잡힌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양희은이 부른 <아름다운 것들>의 작사가도, 양희은의 <고운노래모음 3집>(1973)에 실린 <불나무>를 작사·작곡한 주인공도 방의경이다. 이들 외에도 방의경의 노래들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알음알음으로 전해졌다. 서유석이 부른 <친구야>는 김민기의 <친구>와 더불어 시대의 어두움을 진실되고 차분하게 노래한 곡이다. 뒤에 고(故) 김인순의 노래로 알려진 <하양 나비>도 방의경의 작품이다.
방의경과 관련된 공간을 하나 더 소개한다면 서울 대연각호텔 옆에 있던 ‘음악실’ 내쉬빌을 빼놓을 수 없다. 이곳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음악을 ‘순수하고 진지하게’ 사고한 이들의 거점이었다. 청개구리가 아마추어적이고 비상업적인 공간이었다면 그보다는 좋은 음향 시스템을 갖추고 전문적으로 음악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의 모임이었고, 그 때문에 여타 ‘생음악 살롱’과는 또 달랐다. 이곳에서 방의경·김광희·박두영·박두호·고경훈 등 세칭 ‘내쉬빌파’라는 ‘언더그라운드 포크’ 유파가 태어났다. 앞서 말한 <우리들> 음반은 바로 ‘내쉬빌파’의 기록이다.
이때 방의경의 별명은 ‘두목’이었다. 그가 음악적 리더였을 뿐 아니라 내쉬빌에 들르는 젊은이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다. 음악으로 돈 버는 것을 거부했던 그는 가끔씩 다른 ‘업소’에서 노래를 불러 후배들을 거두었다. 한국 포크의 ‘사감’인 이백천이 운영한 생음악 살롱 르 실랑스의 무대에 서고 받은 ‘수고비’나 72년 기독교방송 라디오의 음악 프로그램 <세븐틴>의 DJ를 맡으면서 받은 봉급은 그렇게 없어졌다. 아, 에피소드 하나 더. 한대수가 <멀고 먼 길>(1974)을 녹음할 때 기타를 빌려준 사람도 방의경이었다. 그의 베푸는 삶을 보여주는 일화다.
동세대 음악적 리더… 비주류들의 동참
그는 76년 음악활동을 중단한 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 그가 한국을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 한국에 돌아온 그의 심정이 어떤지 제대로 헤아리기는 힘들다. 단지 이번 그의 공연이, 그리고 70년대의 ‘포크’음악이 아직도 소중하다면 그건 아마 저항과 낭만이, 자기표현과 사회의식이 하나로 뒤섞였던 그 시기의 이상을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이다. 부연하면 그때는 현대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이었던 ‘어떤 운동’이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듯 80년대 이후 이 두 요소는 때로 극단적으로 분리되었고 아직도 봉합되지 않고 있다.
‘청개구리의 부활’이란 그때의 이상을 재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기획이 정말로 실현될지와는 무관하게 그 첫 테이프를 방의경이 끊는 것은 적절해 보인다. 이런 움직임이 단지 중년층의 노스탤지어에 그치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노력 못지않게 ‘사회 각계의 반응’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할 것이다. ‘일부의 열렬한 관심과 대다수의 무관심’으로 귀결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덧붙임: 이번 공연에는 방의경이 라디오 방송 DJ를 맡던 때 만나서 이후 그의 음악 동료가 되었고, 70년대 해바라기 노래모임을 이끌었던 김의철이 음악감독을 맡는다. 게스트로는 김두수·이성원 등 ‘비주류’ 포크음악인들이 출연한다. 더 상세한 정보는 공연을 공동 주최하는 인터넷 포크음악 동호회 바람새의 홈페이지(www.windbird.pe.kr 특히 ‘청개구리’와 ‘방의경’ 게시판)에 가면 볼 수 있다.
최지선 | 대중음악 웹진 <웨이브> 편집위원

방의경은 김민기와 함께 청개구리의 흐름을 주도했다. 1972년 청개구리홀에서는 공개방송도 자주 열렸다.(YWCA)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70년대를 대표하는 포크 가수들 대부분이 번안곡을 통해 사랑과 낭만을 노래할 때 그는 자기가 직접 만들고 연주한 곡에 사회와 자연에 대한 생각들을 담았다. 그를 빼면, 70년대에 자기 곡으로 음반을 채운 사람은 없었다. 천하의 김민기 독집 음반(대도 EU-716, 1971)에조차 한대수가 만든 한곡과 번안곡 한곡이 실려 있었다. 방의경은 70년대 한국 포크음악의 진정한 싱어송라이터였다. 그에 대한 전설이 단지 가사가 저항적이라는 이유로 그의 음반 <내 노래 모음>에 대해 판금 조처가 내려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방의경의 공연과 함께 재개관하는 ‘청개구리’의 의미 역시 되돌아볼 만하다. 방의경이 젊음을 불태웠던 청개구리는 70년대 한국 포크음악사를 거론할 때 반드시 순례해야 할 중요한 공간이었다. 옛 문헌과 경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70년 6월29일 명동 YWCA 안뜰 단층 건물에서 문을 연 청개구리 홀은 바닥, 벽, 천장이 모두 초록색이었다. 50~60여평쯤 되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야 했고, 얕은 높이의 무대에는 제대로 된 마이크도 없었다. 그렇지만 통기타 소리와 더불어 아무나 사회자가 되고 누구나 가수가 되었던 곳이다. 저녁 7~9시에 영화나 연극 감상, 포크송 ‘싱얼롱’(따라 부르기), 해설이 곁들여진 팝송 혹은 클래식 감상, 명사의 강연, ‘댄스’같이 요일별로 다른 프로그램이 진행되었다. 이런 정규 프로그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곳이 100원의 입장료를 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개방되었다는 점이다. 오갈 데 없는 청춘군상이 아무 때나 들르던 이곳은 ‘포크’, 나아가 70년대 청년문화의 약호였다. 청개구리의 흐름을 주도했던 인물을 딱 둘만 꼽으라면 서울대 미대생이었던 김민기와 이화여대 미대생이었던 방의경일 것이다. 양희은이 직접 언급했듯 이곳은 “재수 시절 들렀다가 영혼을 사로잡힌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양희은이 부른 <아름다운 것들>의 작사가도, 양희은의 <고운노래모음 3집>(1973)에 실린 <불나무>를 작사·작곡한 주인공도 방의경이다. 이들 외에도 방의경의 노래들은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알음알음으로 전해졌다. 서유석이 부른 <친구야>는 김민기의 <친구>와 더불어 시대의 어두움을 진실되고 차분하게 노래한 곡이다. 뒤에 고(故) 김인순의 노래로 알려진 <하양 나비>도 방의경의 작품이다.

한국 포크의 아름다운 대모로 꼽히는 방의경. 지난 6월29일 바람새 공연에 출연해 큰 박수를 받았다.(송명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