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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장진] ‘그의 여자’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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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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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유머감각과 이웃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무기삼은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장진 감독

그는 오래 전부터 대학로 길바닥에서 오며가며 알던 친구다(그는 이 코너에서 만났던 사람들 명단을 죽 듣더니 “누나도 인맥으로 먹고사는구먼” 한다). 그래. 어쩔래) 꼬박꼬박 ‘누나 대접’을 해주긴 하지만 내가 부모님께 용돈 받아가며 중간고사 성적 때문에 고민하던 대학생이었을 때 나보다 두 학번이나 밑인 그는 이미 프로작가가(그것도 험하디 험한 방송판에서) 돼 있었으므로 그는 속으로 날 어린애 취급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내가 ‘선생님’으로 부르는 이상우, 명계남을 그는 ‘형’이라 부르고 내가 알기론 그와 동갑인 ‘수다’(필름있수다)의 직원이 그를 ‘오빠’라고 부른다. 또래들을 얘기할 땐 한참 아랫사람 얘기하듯 한다. 한데도 그런 그가 하나도 건방지게 느껴지지 않는 건 왜일까 너무 일찍 프로세계에 발을 들여놓았기에 본인 스스로가 나일 굉장히 많이 먹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상대를 무시하기는커녕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일까?

사진/ 그는 다음 작품 〈아는 여자〉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떤 여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박승화 기자)

그의 ‘마니아’가 될 수 없었던 이유

팔자에 없는 영화사 대표 역할까지 해내고 있는 요즘, 그는 좀 겉늙어 있었다. 좀 지쳐 보이기까지 했던 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있어서 그런 거 같았다. 그에게 어울리는 자리란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을 재밌는 얘깃거릴 만드는 ‘얘기꾼’이 딱이다. 굳이 일을 맡는다면 판을 벌이고 작전을 짜는 기획자 정도? 엄청난 뭉칫돈이 오가는 걸 진두지휘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그 역시 직함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있다고 고백한다. 내년쯤엔 창작집단 ‘수다’의 수장 자리가 다른 사람이 돼있을 거라며 그 불편한 자리에서 하루빨리 해방되길 바라고 있었다. 모든 배우들이 부러워 마지않는 ‘수다’라는 조직(?)도 무형의 아우라로만 존재해야지 권력의 수직관계가 조금이라도 강조되면 그건 서로 망하는 길이라고 강조한다.


난 그의 연극과 영화를 무척 좋아하는 팬이지만 ‘마니아’라고 할 수는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바로 그의 여성관이었다. 김기덕이나 장선우처럼 여성을 성적 유린의 대상으로 일삼으면 싸워보기라도 하겠다. 하나 그의 작품에 나오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하나같이 그저 ‘맹탕’이었고 성적인 대상조차 되지 않는, 그저 무대나 화면에 남자만 나오면 이상하니까 그냥 집어넣은 존재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물어봤다. “‘입장의 동일함’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라는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방송작가 송지나가 생각났다.

전에 언젠가 그녀에게 어떻게 글을 쓰느냐 물은 적이 있었고 그녀는 참 인상적인 대답을 해줬다. 일단 등장인물들의 캐릭터와 시대상황과 에피소드들이 정해지면 다음은 그들(가상의 등장인물들)이 서로 ‘대화’를 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들이 대화를 시작하면 자긴 그냥 받아 적는다는 거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장진의 상상 속 여자들은 당최 ‘입’을 열지 않는다는 얘기다. 장진 감독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가이며 연출가인 이상우(본 지면에 소개한 적이 있다)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작품엔 왜 제대로 된 여자가 안 나와요?” 했더니 이상우 왈, “난 도무지 여자들의 진짜 마음을 모르겠어”. 장진 역시 그랬다. 여자 캐릭터의 대사는 써놓고도 스스로 확신이 안 가서 언제나 찜찜하다는 거다(아! 이 남자들에게 영화 <왓 위민 원트>(What Women Want)의 멜 깁슨처럼 여자들 마음을 다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이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구라’로 느끼는 희열

사진/ 장진 감독(박승화 기자)
그는 세상이 그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본 덕에 오랫동안 동료와 선후배들로부터 사랑과 동시에 질투의 시선을 받아왔다. 그의 재능을 질투한 동료들 중엔 나도 끼어 있었다. 천재 소리까지 들은 적이 있는 그는 키 크고 잘생겼지, 세련됐지, 똑똑하지, 글 잘 쓰지, 영화 잘 찍지, 말 잘하지, 인복 좋지. 무엇보다 어린 나이에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았지…. 질투를 안 느낄 수 없었다. 참으로 다행()인 건 그는 정작 전공인 연기엔 별 소질이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고백하건대 예전에 그가 무대에 선 어떤 공연을 보다가 슬며시 극장문을 열고 나온 적이 있다. 휴… 다행이다. 그가 연기마저 잘했다면 난 질투를 넘어 무기력감에 빠졌을 거다.

그러나 본인은 연기 못하는 걸 속상해하진 않을 것 같아서 콤플렉스가 뭐냐 물었다. 과대포장돼 있는 자신의 모습이란다. 개인적인 콤플렉스 또한 그런 부풀려진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척해야 하는 거라니 사람이 너무 잘나도 피곤하겠구나 싶다.

내가 그의 여러 가지 장점 중에서 특히 좋아하는 건 타고난 유머감각이다. 그의 ‘구라’ 실력 역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수준이다. 하긴 사람들에게 웃긴 얘길 했을 때 좌중이 뒤집어지는 반응을 보면 영화 하나 히트 쳤을 때만큼 희열을 느낀다니 할 말 다 했지. ‘수다’의 홈페이지엘 놀러갔다가 본 얘기 하나. 직원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고기는 ‘특수부위’가 맛있다는 그의 말에 한 직원이 그럼 특수부위의 반대말은 뭐냐 물으니 ‘예사부위’라 해서 모두 낄낄댔다 한다. 잠시 뒤 누군가 “그럼 군대에서 ‘특수부대’의 반대말은 뭡니까?” 했더니 장진 왈, “그건 ‘니네 부대’지”라고 대답했고 고기를 먹던 직원들은 다 뒤로 넘어갔단다.

이런 기발한 유머감각과 이웃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무기로 갖고 있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 장진 감독. 이런 그의 여태까지의 작품들은 연극이든 영화든 장사가 됐든가 평이 좋든가 아님 둘 다 좋든가 셋 중 하나였다. 한데 이번에 본인이 연출한 건 아니지만 대본을 쓰고 제작에도 어느 정도 발을 담갔으며 ‘자식’ 같은 신하균을 내주었던 영화 <화성으로 간 사나이>가 처음으로 장사도 평도 삼진아웃을 당했다. 자신의 분신처럼 생각하는 신하균의 계속되는 흥행 실패도 가슴 아프지만 “그래도 스토린 죽이네” 소릴 듣던 그가 대본이 재미없단 소릴 들어서 기운이 좀 빠져 있는 것 같았다.

“새로운 신념은 사랑이다”

그가 언제나 ‘닭살’이라고 느끼는 멜로를 썼기 때문일까 입을 꾹 닫고 있는 상상 속의 여자를 억지로 입을 열게 해서 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최근작인 <웰컴 투 동막골>에서 슬슬 시도를 하고 있긴 하지만 ‘생각’ 없이, 존재감 없이 나른하게만 자릴 지키던 그의 여인 ‘화이’와 이제 그만 작별함이 어떨까 생각했는데 마침 준비 중인 그의 신작인 <아는 여자>에서는 드디어 화이가 아닌 ‘이연’이라는 새로운 여자가 등장한다고 한다. 작가 본인도 누군지 알 수 없던 화이가 아닌 장진 자신이 알고 있는(꼭 ‘사랑’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여자에 대해 얘기한다니까 정말 기대된다. 어떤 여자일까?

삼십대 중반이 되고서 느낀 점은 뭐냐 물었다. “내 안에서 적이 없는 세상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장기수 할아버지들이 들으시면 노여워하실지 모를 얘기지만 신념이란 유효한 거라는 것도 깨달았다 한다(아직은 신념에 목숨 걸어도 될 나인데 너무 빨리 늙는 건 아닌가 몰라). 그렇다면 ‘성숙 버전’으로 변신한 새로운 장진의 새로운 신념은 뭐냐 물으니 ‘사랑’이란다. 그가 지금 열애 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쪼록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의 여자’를 확실히 파악해서 내년엔 그의 영화에서 환상에서 벗어난 ‘진짜 여자’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오지혜 |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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