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의 ‘스타일 앤 더 시티’
영화 <파 프롬 헤븐>의 여주인공을 보며 ‘퍼펙트 와이프’를 떠올리다
유시민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이라는 계급보다는 ‘시민’이라는 정체성을 더욱 사랑해 장소에 맞지 않는 옷차림으로 다른 국회의원들의 엄청난 분노를 샀지만, 나처럼 속없는 인간은 패션지 기자라는 내 직업을 너무나 좋아해 아무도 드레스 코드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장소에 갈 때조차 나름대로 신중하게 입을 옷을 고르는 편이다. 정치인들의 의전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한테 눈총 받지 않기 위한 것이라면, 스타일리스트들의 의전은 스스로 즐기기 위한 것이니까.
얼마 전 영화 <파 프롬 헤븐> 시사회에 갈 때 나는 사랑스러운 가정주부를 연상시키는, 타이트한 꽃무늬 셔츠에 도트 무늬가 박힌 주황색 머릿수건을 두르고 갔다. 왜냐하면 영화 <파 프롬 헤븐>의 여주인공 캐릭터는 올해 마크 제이콥스나 도나 카란 등 뉴욕의 대표적인 디자이너들에 의해 트렌드로 떠오른 1950년대 미국의 ‘퍼펙트 와이프’의 전형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야 거의 기분 전환 용도로 퍼펙트 와이프 이미지를 잠시 머리에 둘렀다지만, 궁전 같은 공간 속에서 가슴이 봉긋해 보이는 타이트한 상의에 허리를 졸라맨 듯한 스커트를 입고 어떠한 순간에도 우아한 미소를 잃지 않은 채(심지어 자기 남편이 어떤 남자랑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에도) 파티 음식을 준비하는 중산층 가정의 완벽한 아내상 줄리언 무어(<파 프롬 헤븐>의 여주인공)의 모습은 참으로 딱해 보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숨이 막혔다. 토드 헤인즈 감독은 숨막히게 가식적이고 억압적인 공간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하니, 감독의 의도대로라면 이 영화는 대단한 성공작인 셈이다.
전 미국인들을 사로잡았던 1950년대의 그 퍼펙트 와이프의 정체도 사실은 다 허구였다. 당시 미국은 전쟁과 공황을 이겨낸 후 한창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던 시대였는데, 텔레비전은 <아이 러브 루시> <오지와 해리엇> 등의 시트콤을 통해 티끌 하나 없는 집안에서 우아한 옷차림으로 말쑥한 아이들에게 쿠키를 구워주는 완벽한 아내상을 연일 보여주었다. 왜냐고? 그래야 오븐도 팔고 옷이나 화장품도 팔 수 있으니까.
1950년대의 그 퍼펙트 와이프 이미지가 올해 다시 트렌드로 떠오른 건 9·11 테러와 전쟁의 악몽을 잊기 위해서 뉴욕 사람들에겐 ‘스위트 홈’이라는 환상이 필요했고 뉴욕 시티는 그 환상으로 불황을 돌파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 뉴욕의 디자이너들이 새롭게 유포한 사랑스러운 전업주부 스타일의 원피스와 머릿수건을 잠시 몸에 걸친 대한민국 아가씨들의 의도는?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에게는 스위트 홈의 어여쁜 수호자로 희생당하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 다만 예쁘니까 차용할 뿐이다. 특히 나처럼 퍼펙트 와이프는커녕 남편으로 하여금 제발 양말이라도 제자리에 벗어두라고 통사정하는 초불량 아내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여자일수록 그 이미지 차용은 유쾌하고 즐겁다. 요즘 여자들은 이제 여우처럼 똑똑해졌다. CF 속에서만 행복하게 살고 있는 신데렐라들의 말을 마음껏 비웃으면서도 여자들은 냉장고를 사달라고 조르게 된 것이다.
패션지 <바자> 피처 디렉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