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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미국은 학문을 감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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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7-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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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과학자에 대한 일상적 감시장치 강화… 생물학 논문 사전검열 추진해 학계 반발

미국이 거대한 원형감옥으로 자리잡고 있다. 2054년을 무대로 삼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최첨단 범죄예방 시스템보다 지독한 감시장치를 가동하고 있다. 통합정보인식(Total Information Awareness)이라는 테러 감시용 ‘빅 브러더’ 체계는 이미 일상 깊숙이 침투했다. 정치나 사회, 경제뿐 아니라 교육과 과학마저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는 8월16일부터 미국 위스콘신에서 열릴 예정인 국제 정보올림피아드(IOI 2003)에 관한 우려의 목소리도 흘러나오고 있다. 전 세계 60여개 나라에서 뽑힌 과학영재들이 프로그래밍 실력을 순위로 정하는 이 대회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이슬람권 국가의 자유로운 참여를 가로막을 것으로 예측하기도 한다.

유학생들의 일거수일투족 보고서 작성

사진/ 인간 유전자 서열을 밝힌 셀라라 제노믹스의 연수실 모습. 이 회사 대표 크렉 벤터 박사는 미국 정부의 연구감시정책을 강력히 비난했다.
현재 미국이 지목한 25개국 출신의 유학생들은 교육받는 내용과 관계없이 새로 정해진 유학생 관리시스템에 따라 관리 대상으로 추적받게 된다. 연구실에서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미국의 과학 발달에 이바지한 유학생들. 그들이 이제는 입국시 사진과 지문을 찍는 것은 물론이고 졸업 뒤 3년 동안은 졸업시킨 학교에서 책임지고 어디서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에 보고해야 한다. 물론 이로 인해 저명한 미국 대학 행정부서의 불만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자신의 대학으로 공부하러 온 유학생들의 안정적 연구를 지원하는 데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감시와 그에 따른 보고서 작성에 시간을 쪼개야 하기 때문이다. 관리대상으로 지목된 유학생들은 온갖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예일대학교 박사학위 예정자인 어떤 유학생은 방학 때 자신의 조국으로 휴가차 갔다가 재입국 비자를 받지 못해 한 학기를 놓쳐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미국은 자국인에 대해서도 일상적 보안과 감시체계를 갖춰놓았다. 2001년 10월 코네티컷대학 생물학과 학생 토머스 포렐은 자국의 애국법(Patriot Act)에 의해 기소됐다. 당국의 기소 이유는 법으로 금지한 50여종의 치명적 세균 중 하나인 탄저균을 허락 없이 냉동고에 보관했다는 것이다. 포렐은 담당교수로부터 균을 폐기하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다음 실험에 간편하게 쓰기 위해 다른 냉동고에 보관했다. 그런데 이를 다른 학생이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제보했다. 이로 인해 해당 건물은 몇주간 접근이 차단되는 등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런 ‘죄’는 미국의 애국법에 따라 수억원의 벌금을 내거나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해진다. 다행히 포렐은 테러집단과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 학교 당국과 담당교수의 선처로 6개월의 집행유예와 사회봉사 명령을 받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요즘 미국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생물테러라고 할 수 있다. 우라늄 가공은 집안에서 몇개의 시험관이나 기구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엄청난 기계와 공장 설비 등이 필요하며 이를 감지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비해 생물무기는 60평 정도의 정리된 실험실만 있으면 생산이 가능해 저렴한 비용으로 얼마든지 증산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유전자 서열정보만 이용해도 매우 강력하고 치명적인 유전자 조작 세균을 만들 수 있다. 탄저균 테러에서 보았듯이 생물무기는 작은 편지봉투에 담긴 한 숟가락의 분말만으로도 집단적인 심리적 공황상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의 대학 생물학 실험실을 드나드는 모든 연구원들은 법으로 철저히 관리될 예정이다. 일부에서는 아랍권 출신 학생들의 실험실 출입을 금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과학적 연구가 국가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일부 제한이 필요하다는 입장은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다. 이미 냉전시대에 원자탄 개발문제로 첨예화되었던 사안이다. 1950년대 매카시즘의 원조인 미국의 조지프 매카시 의원은 몇몇 핵물리학자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때 미 표준연구소 소장 에드워드 코돈과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폴 디랙 등은 소련에 다녀온 전력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입국을 거절당하는 등 집중 감시를 받았다. 사실 디랙은 아인슈타인 등과 함께 미국의 핵폭탄 보유에 이바지한 대표적 과학자였다. 그럼에도 자유주의적 사상을 문제로 삼아 입국을 거절한 것이다. 탈냉전 이후 미국은 엄청난 재원으로 전 세계 과학자를 유치해 지금의 과학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문제는 다시 이러한 정책이 9·11 이후에 1950년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생물무기와 관련해서는 학문적 발표마저 막으려 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생물학 저널에 발표하려는 모든 논문은 심사를 위한 제출에 앞서 그 공개가 생물무기 개발에 무관한지를 먼저 검사받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국무부의 한 관계자는 아프간의 동굴에서 미국 유명 생물학 저널에 실린 논문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는다고 생각해보라는 어처구니없는 상상력까지 동원해 압박을 가했다. 이미 국무부 산하 위원회에서 공개 여부를 검증받고 있는 암호학 관련 논문의 방식을 따르자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 내 생물학자들은 1천여종의 생물학 저널에 실릴 논문(암호학 저널은 10여종임)을 심사하자는 것은 연구를 하지 말자는 말과 같다고 주장한다. 게다가 생물학 논문의 검증 과정이 얼마나 안전할 수 있는가도 문제로 지적된다.

과학 통제하며 값싼 연구인력 확보?

생물학 논문 검증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자연과학인 생물학은 수리과학인 컴퓨터학이나 암호학과 달리, 다른 실험자가 논문을 읽고 그 과정을 재연(reproduce)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국 내 안보제일주의자들은 재연할 수 있는 정보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입맛에 맞추려면 논문은 이렇게 돼야 할 것이다. ‘…어떤 X라는 세균의 유전자를 조작 변형하면 위암과 폐암에 특효가 있는 물질을 만든다. 단 그 세균 조작 방법에 대해서는 밝힐 수 없음에 양해를 구한다.’ 이런 식으로 논문을 쓴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궁금하다.

어쩌면 미국 내 과학 관련 학회와 단체들이 정부 정책을 비난하는 속사정은 다른 데 있는지 모른다. 실험이 동반되는 생물학은 많은 일손이 필요한 노동집약적 학문이다. 따라서 적당히 훈련받고 순종적인 외국인 학생들이 지속적으로 들어와야만 미국 내 생물학과 생물산업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 학생의 45%는 외국인 유학생이며, 분자생물학 박사학위자의 약 30%도 타국 출신이다. 이런 실정에서 당장 외국인 학생의 유입이 중단되면 심각한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앞으로 유학생 정책은 한편으로는 엄포를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절한 임금 이하로 연구원들의 대우를 동결하면서 계속해서 미국의 과학적 지위를 이끌어가는 데 매우 효율적으로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결론은 유학생이나 외국인 과학자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면서 국가적 생산력을 증가시키는 쪽으로 나갈 것으로 보인다.

조환규 | 부산대 교수·컴퓨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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