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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축구행정, 헛발질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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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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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 때마다 감독 교체라는 미봉책으로 대응… 마스터플랜 마련해 뿌리부터 튼튼히 다져야

(사진/2년마다 돌아오는 감독 교체의 열병.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인 허정무 감독도 위태롭다)
한국축구는 위기의 계절을 맞고 있다. 2000시드니올림픽에서 8강 진출의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2000레바논아시안컵대회에서도 졸전 끝에 쿠웨이트에 0-1로 패하며 겨우 B조 3위, 와일드카드로 8강에 턱걸이를 했다. 뉴밀레니엄의 ‘희망가’를 불러도 시원찮을 판에 ‘곡(哭)소리’만 들려오는 꼴이다. 일본과 중국은 좋은 기회라도 만난 듯, 한국축구가 ‘종이호랑이’로 전락했다고 꼬집고 있다.

전담의사 한명도 없는 대표팀

한국축구는 몰락한 것인가. 한국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으면 언제나 뜨거운 관심을 보여주는 축구팬들은 4년마다 열리는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희망과 좌절을 반복하는 악순환에서, 또다시 2년마다 걸리는 ‘마술’에서 헤매야 하는가.


한국축구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96아시안컵에서 이란에 2-6으로 참패한 일이나 98프랑스월드컵에서 네덜란드에 0-5로 대패한 과거를 새삼 떠올릴 필요조차 없다. 일본은 물론 중국에도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도대체 무엇인가.

세계축구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축구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한국축구가 70∼80년대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는 데는 축구행정의 미진한 지원력도 한몫 하고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은 2년을 준비한 시드니올림픽에서 스페인과의 1차전을 0-3으로 져 결국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꿴 상처는 컸다. 잘못된 출발에는 부상이란 암초가 도사리고 있었다. 출국 전 나이지리아와 평가전에서 부상한 와일드카드 수비수 홍명보가 호전되지 않아 출전을 포기했다. 결국 강철로 급하게 교체됐다. “괜찮을 것”이라며 오스트레일리아로 갔지만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부상이, 컨디션이 사람 뜻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분명히 있다. 한국대표팀에는 전담의사가 없었다. 물리치료사와 마사지사가 있었을 뿐. 두명의 의사가 상시 지원을 아끼지 않는 일본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자원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적을 내라는 꼴에 다름 아니다.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 지난해 6월의 일이다. 한국은 99코리안컵을 앞두고 6월4일 벨기에와 친선경기를 가졌다. 이 경기는 준비단계에서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이날은 99시즌 프로축구 K-리그의 개막일로 예정된 날이었다. 결국 대한축구협회의 주장대로 벨기에와의 경기가 열렸고 프로축구연맹은 K-리그 개막일을 연기해야 했다. 항상 이런 식이다. 국제축구연맹은 연초에 그해의 대체적인 일정을 발표하고 이웃나라 일본만 해도 시즌 개막을 앞두고 J리그(J1, J2) 경기 일정뿐 아니라 국가대표팀의 일정까지 포함해 자세한 연간계획을 발표한다. TV중계계획까지 알 수 있다.

1년이 지나지 않은 일들을 돌이켜보면 금세 축구행정의 난맥상을 찾을 수 있다. 프로축구연맹은 한·일프로선발과 세계올스타팀과의 친선경기를 대한축구협회 모르게 전격 발표했다가 협회쪽의 면박과 일본쪽의 부인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렀다. 겉도는 연맹과 협회 행정의 대표적인 경우다. 협회는 올해 초 세계적 명장 밀루티노비치와 계약도 맺지 않고 대표팀 기술자문위원으로 위촉한다고 발표했다가 망신을 당했다. 그는 지금 중국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처세술로 연명하는 간부들도 문제다. 월드컵과 올림픽의 실패를 거듭하고도 책임을 전혀 지지 않은 축구협회 고위간부들. 충격적인 패배를 할 때마다 “감독보다 먼저 내가 책임지겠다”고 언론에 호언장담하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흐지부지되는 꼴을 되풀이해왔다. 9월25일 기술위원회를 앞두고 아시안컵 성적에 따라 최종 거취를 결정하겠다고 미뤘던 조중현 전무도 지켜볼 일이다.

유소년 축구 육성, 좀더 체계적으로

(사진/쿠웨이트전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국가대표팀)
그렇다. 주먹구구식으로 이뤄지는 일처리, 언제나 이런 식이다. 근본문제를 찾고 대안과 방책을 수립하는 것을 도모하지 않고 언제나 미봉책으로 일관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또 일본을 비교대상으로 삼아보자. 마치 모범답안처럼 일본을 자꾸 예로 드는 것에 거부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축구가 최근 거둔 놀라운 성과를 본다면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한국축구는 83년 프로축구를 출범시켰다. 일본은 꼭 10년이 늦었다. 80년대에만 해도 한국이 일본축구에 뒤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사정은 어떤가. 역전의 현상은 너무나 뚜렷하다. 한국이 일본과 중국을 이기고 자족과 자만에 빠져있을 때 일본은 착실히 준비를 해왔다. 확실한 ‘프로젝트’를 갖고 청사진을 그렸다. 80년대 초부터 준비단계를 거쳐 93년 프로축구 출범, 과도기를 거쳐 2년 전 2부리그 출범 등 흔들림 없이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했다. 3부리그격인 JFL과 현(縣)리그와 지역리그가 한 체제 속에 묶여 제도화돼 있다. 한국은 어떤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축구 발전을 꾀하는 일은 우수 선수를 길러내는 길밖에 없다. 그동안 끊임없이 지적돼온 유소년 축구의 육성이다. 청소년대표팀의 브라질 훈련, 유소년리그대회 창설 등 움직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체계적인 육성방안은 여전히 찾아볼 수 없다. 교육 프로그램이 없다. 성적 지상주의인 학원축구의 한계를 보완해줄 프로그램이 부족하다. 열악한 환경과 박봉에 시달리는 초등 및 중학교 지도자들이 선수의 장래와 한국축구의 미래를 생각하고 기본기와 전술 훈련을 체계적으로 해주길 바랄 수는 없다. 프로구단에 유소년팀을 활성화하든, 학원축구의 제도적 개선책을 제시하든, 협회와 연맹은 머리를 맞대야 한다. 이는 지도자의 문제와도 연결된다. 좋은 지도자 없이 좋은 선수를 바랄 수는 없다. 지도자 역시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길러내야 한다. 지도자의 육성없이 유소년의 육성은 없다.

2년마다 돌아오는 열병

(사진/아시아컵에서의 졸전을 계기로 한국축구계의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사진은 쿠웨이트전에서 패배하고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있는 이동국)
많은 외신 기자들은 이번 레바논아시안컵에 출전한 한국 대표팀에 이탈리아 세리에A에 진출한 안정환이 빠진 이유를 궁금해 했다. 허 감독이 안정환을 선발하지 않은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이탈리아 적응을 위한 배려이고, 또 하나는 수비력과 체력에 문제가 있는 안정환이 믿음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이유가 더 크다.

한국이 중동축구를 두려워하면서 하는 말이 “개인기(기술)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작 기술보다는 체력과 정신력을 바탕으로 한 ‘힘의 축구’를 선호한다. 그래서 키가 작고 수비력이 약하면 고려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 힘도, 유럽 같은 더 큰 힘 앞에서는 힘 한번 써보지 못하지만.

일본의 원동력은 풍부한 미드필드의 힘이다. 나카타, 나나미, 나카무라, 이나모토 등 좋은 미드필더들이 즐비하다. 결국 패스와 개인기가 좋다는 말이다. 감독이 자기 스타일에 맞는 선수를 고르는 게 우선인가, 선수의 장단점을 파악해 스타일을 맞추는 게 더 중요한가.

한국축구는 초라한 성적을 남길 때 어떻게 처리하는가. 협회는 예외없이 감독을 경질한다. 전쟁에서 패한 장수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어찌 감독만의 책임인가. 98프랑스월드컵의 차범근 감독이 그랬고 시드니올림픽과 아시안컵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인 허정무 감독도 위태롭다. 경질설이 나돈다. 2년마다 돌아오는 열병 같은 마술은, 근본적인 원인과 진단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1차 책임은 감독에게 쏠린다. 그리고 남는 것은 없다. 미봉책만, 감독 교체란 충격요법과 속죄양만 있다.

국가대표팀의 구성을 이루는 뿌리는 프로축구다. 프로리그를 통해 경기력을 키우고 우수 선수들이 발굴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협회는 국가대표가 언제나 프로축구보다 위에 있다는 식의 발상을 갖고 있다. 프로리그 일정은 아랑곳없이 대표팀 경기를 끼워넣고 대표팀 훈련기간을 확보하기 위해 프로선수들의 소집일을 앞당긴다. 얼마 전 청소년대표팀의 소집문제로 협회와 안양LG구단이 마찰을 일으킨 것도 그 예의 하나이다. 세계 수준에 뒤지니 훈련기간을 늘려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이제 하지 말아야 한다. 프로리그를 통해 경기력 향상을 꾀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2년을 준비한 올림픽대표팀이, 팀이 구성된 지 보름도 안 된 스페인에 참패를 당한 결과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문제는 일관된 정책과 장기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 즉 마스터플랜을 마련해 뿌리를 튼튼히 다져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없이는 안 된다. 돈, 인력, 노력이 모두 투입돼야 한다. 2002한·일월드컵을 끝내도 한국축구는 끝나는 것이 아니다.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르다는 말이 있다. 새롭게 출발할 때다.

박정욱/ 스포츠서울 체육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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