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동갑내기 여자의 성과 사랑·우정을 담은 영화 <싱글즈>가 반가운 이유
“29살, 애인말고도 가지고 싶은 건 많다.” 미국의 패미니스트 극작가 웬디 와서스타인 원작의 뮤지컬 <여우들의 파티>의 이 홍보문구는 영화 <싱글즈>(7월11일 개봉)에도 딱 들어맞는다. 4명의 젊은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사실은 두 여자친구의 이야기인 <싱글즈>에서 나난(장진영)과 동미(엄정화)는 사랑과 섹스와 결혼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경쾌하게 이야기하지만, 직업과 꿈, 우정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여자친구들끼리의 우정이다. 스물아홉 여자의 고민과 기쁨이 어찌 연애와 섹스뿐이겠는가. 정말 그들의 욕망과 고민을 아는가
20대 후반~30대 초반 여성들의 욕망을 드러내는 영화와 드라마의 행진- <싱글즈> <옥탑방 고양이> <바람난 가족>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브리짓 존스의 일기> <섹스 앤드 더 시티> <프렌즈> <여우들의 파티>- 은 이 세대 여성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확실히 요즘 이 여성 세대는 이 나이에 아직 결혼의 울타리에 들어가지 않고 여전히 미래를 탐색하며, 때로는 힘들어 징징대면서도 자기의 일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 2천년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현상’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덕분에) 이들의 고민은 한층 복잡하다.
“용돈이 아니라 월급이라는 것을 받게 된 뒤 아침마다 고민할 게 많다”는 29살 디자이너 나난도 마찬가지다. 머리에 동전만한 원형탈모증을 발견한 우울한 날 헐레벌떡 뛰어들어간 회의에서 상사에게 팍팍 깨지고, 오랫동안 사귄 애인은 “우리 관계 나도 잘 모르겠어. 사랑하니까 널 놔줄게”라는 흔하고 비겁한 변명과 함께 결별을 통고한다. 그리고 비열한 상사 때문에 외식사업부 레스토랑 매니저로 사실상 해고나 다름없는 좌천을 당한다. 일은 끔찍하고 손님들은 괜히 시비를 걸고. 아, 그냥 사표를 내야 하나?
나난의 동갑내기 죽마고우인 동미는 전세금이 모자라 착한 남자 정준(이범수)과 섹스 없는 동거를 한다. 오는 남자 마다 않고, 가는 남자 잡지 않는 과감한 그녀는 일도 잘하고 친구도 많은 멋진 여자다. 그러나 회사 일을 빌미로 은밀히 만나자는 팀장에게 화끈하게 복수한 뒤 실업자가 된다. 기죽지 않고 창업을 준비하다가 ‘하룻밤의 실수’로 임신을 하지만, 낙태하지 않고 아이를 혼자서 잘 키우겠다고 결심한다.
서른이 되면 뭐 하나라도 뚜렷하게 이룬 일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집에서 독립하겠다는 목표만 달성했을 뿐이고” 회사에서는 그럭저럭 4~5년차가 됐지만 ‘계속 해야 되나’ 싶을 만큼 치이고, 연애는 팍팍 깨지는데다, 한두개씩 늘어가는 주름살과 흰머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기 시작하고, 결혼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명절날이 두렵고, 찜질방이나 마사지실에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늘고, 애인과 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도 많은, 서른을 앞둔 아홉수의 모습을 수다떨듯 현실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일종의 성장 영화이기도 하다. 10대에만 성장하는 것은 아니니까.
여성의 생존법, 생생한 대사에 담아
싱글들의 모습을 풍부하게 스케치하고 생생한 대사와 씩씩한 시선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싱글즈>는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트렌디 영화다. 그것은 딱 이 세대의 여성인 메인작가 노혜영씨의 공이기도 하다. “오래 전부터 서른을 앞둔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는 권칠인 감독은 일찌감치 작품의 원작인 일본의 TV 미니시리즈 <29살의 크리스마스>(1995)의 판권을 사뒀다. 2년 동안 제자리걸음을 하던, 한국 현실에 맞는 일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작업은 뒤늦게 합류한 노혜영씨의 거침없는 대사들을 타고 급진전됐다. 실연당한 지 얼마 안 돼 새로 데이트를 시작한 나난에게 “배고프다고 아무거나 덥석 먹지 마라. 누굴 잊기 위해서 급하게 새 남자 만나는 거 위험하다”고 말하고, 결혼할지 말지 고민하자 “대한민국에 젤 부족한 게 뭔지 아냐? 바로 괜찮은 수컷이야. 그만하면 별 4개짜리는 된다. 안심해”라고 충고하는 동미의 대사는 친구의 자취방에 앉아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새 창문 밖으로 새벽 어스름이 밝아오는 딱 그런 풍경이다. 결혼 뒤 일과 공부에 대한 고민도 이들의 대화로 하면 이렇다. “아침 적당히 해주고 밤에 적당히 서비스만 해주면 남편이 학비 대주고 용돈도 주겠다는데, 그런 찬스가 어딨냐.”(동미) “그런데, 남의 손 빌려 밑 닦은 것처럼 찜찜해. 내가 원했던 게 한꺼번에 이뤄지는데 뭐냐, 이 허허한 기분은….”(나난)
여자끼리의 우정에 초점을 맞춘 것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재미다. 혼자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한 동미에게 “네 인생 그렇게 함부로 하면 안 된다. 앞으로 결혼은커녕 취직도 연애도 못한다”고 말리지만, 결국 아이를 낳겠다고 하자 “내가 아빠가 되어줄게”라며 함께 출산 준비를 하는 나난의 모습은 약간의 과장은 있을망정 허구는 아니다. 고통스러운 순간 여자친구에게 마음을 털어놓고 함께 울고 의지했던 기억이 있는 이 또래 여자들에겐. 권칠인 감독은 “‘이런 사랑하고 싶다’보다는 ‘이런 친구들과 함께 있고 싶다’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 깔끔한 트렌디 영화에서는 여성들이 지고 있는 힘겨운 문제들이 너무 쉽고 쿨하게 해결된다. 성이나 임신, 남자와의 갈등 등 하나의 주제에 대해 더 깊이 얘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낙태 대신 미혼모를 택한 동미가 겪는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그린다면 영화는 더 어두워져야 했을지 모르고, 자기의 아이디어를 빼앗고 좌천시킨 상사에게 보란 듯이 복수하는 일도 현실에서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이 영화의 너무나 완벽한 남자 주인공들 때문이기도 하다.
그대는 아직도 ‘판타지’를 꿈꾸는가
영화에 등장하는 두 여자의 죽마고우 남자친구 정준과 나난의 애인 수혁(김주혁)은 너무나 완벽해서 비현실적이다. 애인과 결별하고 엉엉 울며 찾아온 나난의 얘기를 다 들어주고, 바쁜 동미를 위해 저녁밥을 준비해놓고, “연애는 착한 남자랑 하지만, 결혼은 부자 남자랑 할 거”라는 어린 애인 때문에 마음앓이를 하지만 폭력적이 되지 않으며,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남자친구 정준은 할리우드 영화의 천사표 게이 남자들을 그대로 데려온 것 같다. 오랫동안 나난을 지켜보다 어느 날 말을 건 ‘고물차 탄 왕자님’ 수혁은 처음에는 느끼하고 매력 없는 것 같지만 점점 속 깊은 진실한 사랑을 보여준다. 여자가 머리가 아프다며 “똥차로 마중 나오는 게 무슨 자랑이냐”고 화를 내도 두통약을 사들고 문 앞에 조용히 앉아 기다리고 “내 자신이 뭘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어 지금은 결혼을 할 수 없다”는 말에 두말없이 “나 기다리는 게 특기거든” 유쾌하게 말하고 뉴욕으로 떠나는 그는 한국에서 발견 확률 0.00001%인 ‘여성들의 판타지’다.
그러나 일년에 수십편씩 쏟아지는 한국 영화들이 싸나이들의 의리 아니면 어설픈 웃음을 내세우거나 여자들의 주체적인 성을 이야기한다며 남성 판타지를 복화술로 덧씌우는 현실에서 이만큼 애정 어린 눈으로 여성들과 대화하는 영화를 만났다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 스물아홉 동갑내기 여자의 성과 사랑, 우정을 담은 영화 <싱글즈>. <싱글즈>는 싱글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고 생생한 대사와 씩씩한 시선으로 풍부하게 그렸다. 여성들의 대화에 귀기울여 그들의 고민을 들어본다. |
“29살, 애인말고도 가지고 싶은 건 많다.” 미국의 패미니스트 극작가 웬디 와서스타인 원작의 뮤지컬 <여우들의 파티>의 이 홍보문구는 영화 <싱글즈>(7월11일 개봉)에도 딱 들어맞는다. 4명의 젊은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사실은 두 여자친구의 이야기인 <싱글즈>에서 나난(장진영)과 동미(엄정화)는 사랑과 섹스와 결혼에 대해서도 솔직하고 경쾌하게 이야기하지만, 직업과 꿈, 우정도 포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여자친구들끼리의 우정이다. 스물아홉 여자의 고민과 기쁨이 어찌 연애와 섹스뿐이겠는가. 정말 그들의 욕망과 고민을 아는가

사진/ 20대 후반 여성들의 욕망을 애정어린 눈으로 담은 <싱글즈>. 동갑내기 두 여자의 남자는 너무나 완벽해서 비현실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