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안 감독이 재창조한 액션 블록버스터 <헐크>… 비극적 상황을 만화적 상상력으로 돌파
변신해도 이성의 호감을 잃지 않는 것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 정도일 것 같다. 오히려 슈퍼맨은 ‘도착적인 의상’으로도 애인의 경탄을 사는가 하면 스파이더맨은 거꾸로 매달린 자세에서도 여자친구와 황홀한 프렌치키스를 나눈다. 변신으로 아무리 많은 능력을 갖게 될지라도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될 때, 그때부터 존재의 비극은 시작된다.
어릴 적 텔레비전으로 본 <두 얼굴의 사나이 헐크>도 그랬다. 매회 헐크 곁엔 멋진 여성이 등장해 뭔가 로맨스가 싹틀 것 같은 분위기를 피우다가도 으레 성질을 돋우는 악한들이 나타나고, 그러면 결국 분을 참지 못한 주인공은 실핏줄이 터질 듯 눈에 힘을 주다 와지직 옷이 터져나가며 녹색 근육질로 변하고 말았다. 한참 괴력을 발휘하고 난 뒤 다시 인간으로 돌아가면 그 여인의 눈에 뜨이지 않도록 부랴부랴 짐을 챙겨 떠난다. 엔딩 피아노곡 가 흐를 때 또다시 정처 없는 길을 떠나는 헐크의 뒷모습은 얼마나 슬펐던지.
욕망의 대가, 존재의 비극
<와호장룡>의 리안 감독이 재창조한 헐크의 비극성은 ‘셰익스피어적으로’ 더 복잡하고 심오하다. 만화와 TV시리즈에서 과학적 실수로 헐크가 되었던 데이비드 브루스 배너 박사를 영화에선 아버지 데이비드(닉 놀테)와 아들 브루스(에릭 바나) 두명으로 나누었다. 슈퍼면역시스템을 연구했던 데이비드와 30년 뒤 아버지와 비슷한 분야를 연구하는 촉망받는 젊은 과학자 브루스. 데이비드는 인체실험을 자신의 몸에 직접 한 결과 ‘다른 무엇’을 물려받은 아들을 잉태시키고 치료법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하지만 정부가 금지한 실험을 했다는 이유로 상관인 썬더볼트 로스에 의해 연구소에서 쫓겨나고 아들과 떨어져 유폐된 삶을 살아간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아버지와 그 욕망의 대가로 두려운 삶을 물려받은 아들. 이들은 애초부터 갈등의 씨앗을 안고 있다. 수십년 만에 대면한 이들이 서로 ”죽여야 했어”라며 으르렁거리는 장면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재연에 다름 아니다. 연구소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고로 ‘헐크’로 변신한 브루스는 연애도 엉망진창이다. 하필이면 아름다운 여자 동료 베티(제니퍼 코넬리)가 아버지 데이비드와 원수인 로스 장군의 딸이라니. “네 인연이 아니다”라며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아버지들과 그 사이에서 번민하는 아들·딸은 로미오·줄리엣과 꼭 닮았다. 상황은 비극적이지만 억압됐던 브루스의 분노가 헐크로 변한 모습은 끔찍하기보다는 자유로워 보인다. TV시리즈에선 보디빌더 루 페리뇨가 헐크로 분장했지만 이번엔 ILM의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몸무게 400kg의 ‘녹색괴물’을 탄생시켰다. 브루스는 헐크로 변할 때 기분이 어땠느냐는 베티의 질문을 받고 “무엇보다 끔찍한 건 내 안의 ‘놈’이 나를 지배할 때 그걸 즐긴다는 거야”라고 답하는데, 과연 슈렉을 뻥튀기한 것과 같은 헐크가 시속 160km의 속도로 쿵쿵 점프를 하며 사막을 넘고 협곡을 건너는 모습은 꿈속에서 날아가는 것과 같은 쾌감을 느끼게 한다. 부시의 미국을 경고하는 장면도
흥미로운 점은 온갖 무기를 동원해 헐크를 ‘박멸’하려는 군대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전·이라크전 등에서 중동의 사막과 고원을 초토화시키는 미국의 힘을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헐크가 계곡에 몸을 숨기면 아예 바위를 다 부숴버리고 바다에 빠지면 물 속을 미사일로 융단폭격한다(총에 이어 요격미사일·전투헬기 등 갖가지 첨단 무기를 동원해 ‘산전 수전 공중전’을 펼쳐도 헐크를 물리치지 못하자 나중엔 핵폭탄까지 투하한다). 위기감을 느낀 로스 장군이 전시명령권을 달라며 백악관으로 연락하자 콘돌리자 라이스 안보보좌관과 비슷한 여자가 전화를 받더니 대통령한테 연결해주는데, 이 장면 역시 예사롭지 않다. 한가하게 낚시를 즐기다 얼떨결에 전화를 받고 어리버리 결정을 내리는 대통령의 얼굴은 부시와 꼭 닮았다. 전 세계에 패권을 휘두르는 미국 일방주의에 대한 예견도 섬뜩하다. 종반부에서 헐크의 힘을 빨아들여 무한 에너지를 얻은 데이비드가 끝내는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에너지 덩어리로 변해버려 “내 힘을 도로 가져가”라고 외치는 대목은 미국의 앞날에 대한 경고를 담은 것으로 읽힌다.
영상으로 만들어진 헐크가 본래는 마블 코믹스 시리즈 속 히어로였음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도 곳곳에 넣었다. 화면을 만화의 컷 나누기처럼 분할하거나 헐크를 괴롭히던 악당이 죽는 장면을 만화 그림체로 만들어버려 통쾌한 웃음을 선사한다.
재미있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헐크에게 가졌던 고전적인 궁금증 하나가 이 영화에선 마침내 풀린다는 것이다. 배너 박사가 몸집이 훨씬 큰 헐크로 변할 때 왜 다른 옷은 다 찢어져도 팬티는 그대로일까 고탄력 소재로 만든 특수 팬티다, 아니다를 놓고 벌어졌던 논란도 끝날 때가 된 것 같다. 헐크의 팬티도 무리하면 찢어진다. 리안 감독은 사실감을 높이기 위해서인지 베티에게 달려든 유전자변형 개들을 처치하고 다시 인간으로 돌아간 브루스의 알몸을 살짝 보여준다.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정처 없는 길을 떠났던 헐크가 다시 돌아왔다. 헐크는 첨단무기에 맞서며 미국의 힘을 풍자하기도 한다.
<와호장룡>의 리안 감독이 재창조한 헐크의 비극성은 ‘셰익스피어적으로’ 더 복잡하고 심오하다. 만화와 TV시리즈에서 과학적 실수로 헐크가 되었던 데이비드 브루스 배너 박사를 영화에선 아버지 데이비드(닉 놀테)와 아들 브루스(에릭 바나) 두명으로 나누었다. 슈퍼면역시스템을 연구했던 데이비드와 30년 뒤 아버지와 비슷한 분야를 연구하는 촉망받는 젊은 과학자 브루스. 데이비드는 인체실험을 자신의 몸에 직접 한 결과 ‘다른 무엇’을 물려받은 아들을 잉태시키고 치료법을 찾기 위해 고심한다. 하지만 정부가 금지한 실험을 했다는 이유로 상관인 썬더볼트 로스에 의해 연구소에서 쫓겨나고 아들과 떨어져 유폐된 삶을 살아간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했던 아버지와 그 욕망의 대가로 두려운 삶을 물려받은 아들. 이들은 애초부터 갈등의 씨앗을 안고 있다. 수십년 만에 대면한 이들이 서로 ”죽여야 했어”라며 으르렁거리는 장면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재연에 다름 아니다. 연구소에서 일어난 우연한 사고로 ‘헐크’로 변신한 브루스는 연애도 엉망진창이다. 하필이면 아름다운 여자 동료 베티(제니퍼 코넬리)가 아버지 데이비드와 원수인 로스 장군의 딸이라니. “네 인연이 아니다”라며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아버지들과 그 사이에서 번민하는 아들·딸은 로미오·줄리엣과 꼭 닮았다. 상황은 비극적이지만 억압됐던 브루스의 분노가 헐크로 변한 모습은 끔찍하기보다는 자유로워 보인다. TV시리즈에선 보디빌더 루 페리뇨가 헐크로 분장했지만 이번엔 ILM의 컴퓨터그래픽 기술이 몸무게 400kg의 ‘녹색괴물’을 탄생시켰다. 브루스는 헐크로 변할 때 기분이 어땠느냐는 베티의 질문을 받고 “무엇보다 끔찍한 건 내 안의 ‘놈’이 나를 지배할 때 그걸 즐긴다는 거야”라고 답하는데, 과연 슈렉을 뻥튀기한 것과 같은 헐크가 시속 160km의 속도로 쿵쿵 점프를 하며 사막을 넘고 협곡을 건너는 모습은 꿈속에서 날아가는 것과 같은 쾌감을 느끼게 한다. 부시의 미국을 경고하는 장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