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 찬미> <굳세어라 금순아> 등 13곡 현대적 탄생… 가슴에 파고드는 트로트의 변신을 즐겨보라
“트로트를 불러봐.” 지난해 기획사 동료들의 기획안을 받아든 한영애는 4개월 동안 도망다녔다. “난 싫어, 난 못해, 트로트를 어떻게 불러.” 그렇지만 그는 결국 1925년부터 1953년까지의 트로트 13곡을 너무나 매력적으로 변신시킨 <비하인드 타임>을 들고 왔다.
‘시간의 뒷편’이라고 쓰인 초현실적인 앨범 재킷의 첫장을 들추면 단발머리에 꽃무늬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바람난 신여성’ 한영애가 어디론가 걸어간다. 과거도 현재도 아닌 묘한 모습. 그가 부르면 반세기 전의 음악도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 속으로 다시 걸어온다. 깊이 저 깊이서 흘러 나오는 힘 있는 목소리와 자신의 색깔으로 곡을 소화해버리는 해석력, 가냘프지 않은 아름다움은 대중의 귀에 친숙한 노래들을 만나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가 촌스럽다고 외면해 버렸던 노래들이 새삼 가슴을 파고 든다.
왜색가요 선입견 떨치고 시대 속으로
“떠밀려 시작했지만, 노래하다 보니 안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정말 좋은 우리 음악을 발견했다. 우리 가요사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한다. 그것은 대단한 블루스 가수라는 칭호를 달고 살아온, 가장 이국적인 이미지가 따라다니는 그가 한국 근대 대중음악사를 새롭게 만나는 작업이었다. 그 역시 노래를 처음 시작한 1970~80년대에 트로트가 왜색가요이며 비판하고 극복해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트로트는 일본을 거쳐서 수입된 서양 음악, 우리가 직접 만나지 않고 일본을 통해 만난 우리 근대의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굳어져버린 ‘트로트’에 대한 선입견 뒤에, 힘든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절절한 감정을 정확하게 담아내 간결하고 정결하게 표현된 아름다움이 숨어 있었음을 재발견했다.
“전문가들의 얘기를 듣고 자료를 찾아보니 트로트는 일제시대에 도시의 지식인들이 만든 가장 첨단의 대중음악, 한 시대의 정신을 담은 음악이었다. 애절한 감정을 정확하게 포착해 표현하면서도 따뜻하고 지적이다. 물론 탄식, 비탄, 자괴감이 지나치게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당시 시대가 그렇지 않았나. 그 시대에 이런 음악은 사람들에게 절절하게 다가왔다. 윤심덕 판은 당시 무려 5만장이 팔렸다. 유성기 있는 집은 다 산 것 아닐까.”
그는 이 옛 노래들을 흐트러지지 않고, 정결하게 집중해 불러야 했고, 의외로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털어놓는다. “듣지만 말고 한번 불러 봐야 한다. 삿되게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정신이 담겨 있다. 차분히 앉아 노래들에 귀기울이니 정서적인 힘이 대단하다. 정말 명곡들이더라. 아는 노래라고 얕잡아보다가는 큰코다친다. 현재의 느낌으로 새롭게 재발견해야 한다.” 한영애의 말처럼,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요만은/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밤/ 고요히 창을 열고 별빛을 보면/ 그 누가 불어주나 휘파람 소리”(<애수의 소야곡>)나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사의 찬미>)처럼 가슴 깊은 곳을 조용히 파고드는 가사들을 가볍게 뱉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재해석한 노래마다 색다른 맛 물씬
이번 음반에는 근대 대중음악 초창기의 <따오기>(1925)와 윤심덕과 김우진의 비극적인 사랑으로 더 유명한 <사의 찬미>(1926)부터 미국의 음악이 직접 대중에게 전해지기 시작한 53년에 발표된 <굳세어라 금순아>(1953)까지를 담았다. 일제시대 최고의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1935), 이난영과 쌍벽을 이룬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1938), 시인 김안서(김억)가 쓰고 일본 유학파 작곡가 이면상(<울산아가씨>의 작곡가로 월북)이 곡을 붙인 뒤 평양 출신 기생 선우일선이 불러 큰 인기를 얻었던 <꽃을 잡고>(1934) 등도 들을 수 있다. 지리산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그래서 불온한 음악이라는 낙인이 찍혔던 <부용산>(1947년)은 한영애의 작업을 통해 2절까지 처음으로 정확하게 녹음됐다.
수백곡이 넘는 후보곡들 중에서 13곡을 골라내는 일도 쉽지 않았다. 복각판 등을 통해 보존된 300곡 중에서 노랫말이 현재에도 어우러질 수 있는 곡,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편곡할 수 있는 곡들을 그가 직접 골랐다. “빠진 곡 중에서 <청춘고백> <고향초> <찔레꽃> 등은 많이 아쉬운 부분이다. 그리고 그 시대 노래가 청승맞다는 선입견과는 달리 알려지지 않은 밝고 재미있는 노래, 생활과 밀접한 노래도 많았다.”
젊은 음악창작집단 복숭아는 편곡과 프로듀싱을 맡아 반세기 전의 노래들에 새 옷을 입혔다. 달파란(강기영), 장영규, 방준석, 이병훈 등 가장 실험적인 뮤지션으로 꼽히는 이들은 우리 귀에 너무 익숙한 음악을 입체적이고 연극적으로 바꿔놨다. 기타나 아코디언 정도에 머물렀던 반주 악기들도 훨씬 풍성해졌다. 오래된 멜로디를 모던한 감각으로 풀어낸 <애수의 소야곡>은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아름다움을 전하고, <외로운 가로등>은 블루스 느낌이 강렬한 기타와 재즈 느낌을 주는 클라리넷과 잘 정돈된 현악기 연주가 어우러지며, 엠비언트 테크노 분위기로 다듬어진 <사의 찬미>는 처절하게 허무하고 우울하다. 과감한 해석을 도입한 다른 곡들과는 달리 <목포의 눈물>과 <타향살이>는 원곡에 가깝게 다가갔다.
이 음반을 듣다보면 리듬이 우리 근대 대중음악에서 얼마나 새로운 요소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거의 모든 곡은 멜로디 위주였고, 리듬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복숭아’가 새로운 리듬들을 집어 넣은 곡들은 너무나 흥겹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신한다. 스카 리듬 위에서 불리는 <선창>(1941년)이나 <굳세어라 금순아>를 듣고 있으면 자연스레 온몸이 들썩이다.
멜로디 위주의 곡에 리듬 집어넣어
‘역사’를 노래하고 난 지금, 한영애의 다음 계획은 무엇일까? 그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이제는 내 맘대로 음악을 해도 되겠다 싶다”며 “빨리 록 음반을 준비하고 싶다”고 했다. 포크로 노래를 시작해 20년 동안 블루스, 록, 테크노, 트로트 등을 고루 부른 그는 “어느 장르에 얽매이지 않고 여러 장르가 섞인 음악을 자유롭게 노래하고 싶다”고 말한다. 얼마 전 그는 고등학교 때 이후 계속 길러온 긴 머리를 잘랐다. 뭔가 달라질 결심인가 보다.
20년 동안 무대에서 현실과 저 멀리 떨어진 듯한 독특한 이미지와 강렬함으로 많은 팬들을 꼼짝 못하게 했던 그는 “사실은 나 너무 모범생이고 조용히 산다”고 웃었다. 그리고, “아직도 공연 연출노트를 꾸밀 때마다 초등학교 때 소풍가기 전날처럼 떨린다. 현재의 느낌과 감정에 솔직해지려고 노력하면 무대와 음악은 항상 새롭다”는 무대의 비결도 살짝 들려줬다. 그는 7월 11일과 12일 성균관대학교 새천년홀에서 또 한번의 새로운 콘서트 ‘풀 문’(fool moon)을 마련한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 그가 부르면 역시 달랐다. 1925년부터 53년까지의 트로트 13곡을 매력적으로 재탄생시킨 〈비하인드 타임〉. 한영애의 목소리를 통해 새롭게 변신한 트로트를 즐겨보자. |
“트로트를 불러봐.” 지난해 기획사 동료들의 기획안을 받아든 한영애는 4개월 동안 도망다녔다. “난 싫어, 난 못해, 트로트를 어떻게 불러.” 그렇지만 그는 결국 1925년부터 1953년까지의 트로트 13곡을 너무나 매력적으로 변신시킨 <비하인드 타임>을 들고 왔다.

“떠밀려 시작했지만, 노래하다 보니 안했으면 어쩔 뻔했나 싶었다. 정말 좋은 우리 음악을 발견했다. 우리 가요사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었다”고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한다. 그것은 대단한 블루스 가수라는 칭호를 달고 살아온, 가장 이국적인 이미지가 따라다니는 그가 한국 근대 대중음악사를 새롭게 만나는 작업이었다. 그 역시 노래를 처음 시작한 1970~80년대에 트로트가 왜색가요이며 비판하고 극복해야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트로트는 일본을 거쳐서 수입된 서양 음악, 우리가 직접 만나지 않고 일본을 통해 만난 우리 근대의 단면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굳어져버린 ‘트로트’에 대한 선입견 뒤에, 힘든 시대를 살아야 했던 사람들의 절절한 감정을 정확하게 담아내 간결하고 정결하게 표현된 아름다움이 숨어 있었음을 재발견했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노래한 한영애. 그는 트로트에서 테크노까지 장르의 벽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