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민중의 염원이 되살아난다

466
등록 : 2003-07-02 00:00 수정 :

크게 작게

번역본의 일대격돌 예고하는 황석영의 <삼국지>… 좌절한 영웅들의 이야기에 민중의 소망 담아

누구나 한번쯤 영웅호걸의 치열한 경쟁에 가슴 졸이고 피비린내 나는 중원의 싸움터를 달리게 했던 <삼국지>가 최고의 이야기꾼을 만났다. 소설가 황석영(60)씨가 <삼국지>(전 10권·창작과비평사 펴냄)를 번역해 낸 것이다.

<삼국지> 황석영 옮김, 창작과비평사 펴냄
출판계와 서점가는 황석영 <삼국지>와 이문열 <삼국지>(민음사 펴냄)의 ‘적벽대전’을 숨죽이며 기대하고 있다. 이문열 <삼국지>는 1988년 초판 발행 뒤 약 1300만부가 팔려 지난 1세기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꼽히고 있다. 황석영씨는 옮긴이의 말에서 “일본에서는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번역본 중에도 은근히 그런 시도를 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데, 이는 패권과 현실에서의 힘을 추구하는 가치관에서 비롯한 것이다. 나는 저런 이른바 ‘현대적’ 해석에 대해서 백성들의 보편적인 염원을 훨씬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해 조조를 긍정적으로 서술한 이문열 <삼국지>를 은근히 비판하기도 했다.

원전보다 실감나는 전쟁 장면 등 돋보여


초등학교 때 피난 갔던 대구에서 청소년 잡지 <학원>에 연재된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를 처음 읽은 뒤 청년이 될 때까지 수없이 <삼국지>를 읽은 마니아였다는 황석영씨가 직접 번역을 시작한 것은 방북 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하던 1997년이다. 당국에서 글쓰기를 금지해 괴로워하던 때 후배들이 번역이나 해보라며 권한 것이다. 그는 “세르반테스가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돼 터키의 감옥에서 <돈키호테>를 집필했다거나, 단테가 감옥에서 <신곡>을 썼다든가 하는 일화를 되새기려 번역에 몰두했다”고 회상한다. 이때 시작한 번역은 7년 동안 계속됐고, 황씨는 나빠지는 시력 때문에 안경을 두번이나 바꾸면서 작업을 마쳤다.

사진/ 작가 황석영씨는 원본의 역사의식에 충실한 번역본을 내놓았다.(한겨레 이정용 기자)
‘민중작가’ 황석영씨의 번역은 유비, 관우, 장비라는 실패하고 좌절한 영웅을 기리는 원본의 역사의식에 충실하다. 그는 600년 전 원말·명초의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나관중이 <삼국지>를 쓰면서, 승리한 위나라를 정통으로 삼았던 진수의 정사 <삼국지>가 이미 있음에도 이와 달리 몰락한 촉한을 정통으로 삼았던 맥락을 강조한다. “유비가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서도 의리를 지키느라고 여포에게 여러 번 시달린다든가, 한중 파촉을 대번에 차지할 수 있었는데도 대의명분 때문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가까스로 기반을 마련하는 과정을 보면 <삼국지>가 당대 민중들과 더불어 추구하려 한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의를 추구했지만 실패하고 좌절한 영웅들의 이야기는 시대로부터 외면당한 민중의 소망을 투영하고 있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지만, 원전에서 건조하게 묘사된 전쟁 장면은 작가 특유의 힘 있는 문체를 통해 원전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의 생동감을 보탰다.

또 이야기 중간에 삽입된 한시 210수는 옮긴이가 특별히 공들여 작업한 부분이다. 원본은 매회의 제목이 7언2구의 시로 되어 있으며, 본문 중간중간에도 시들이 삽입돼 있고 한 장의 마무리도 한시로 끝난다. 이는 중국소설의 형성과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의 흐름과 맛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황씨는 삽입된 시들이 이야기의 흐름에 매우 중요한데도 기존 번역본들에서는 아예 빠져 있거나 거칠게 번역돼 있는 점을 비판해 본디 시의 구실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가 번역을 마친 원고는 중문학자들이 다시 손질했다. 우석대 전홍철 교수가 원전과 비교, 대조해 교열을 보았고, 성균관대 임형택 교수가 한시 번역을 감수했다. 여기에 중국 고전인물화의 대가로 꼽히는 왕훙시(王宏喜) 화백의 삽화 150여장을 실었다.

또 부록 <즐거운 삼국지 탐험>에는 당시에 쓰인 각종 병장기 그림과 설명, 주인공들의 인물화, 문화계 인사들의 ‘내가 읽은 삼국지’ 삼국지 유적 사진 등을 담았다.

<수상삼국연의> 원본으로 삼아… 생의 의지와 반성을

원전 판본도 독특하다. 일제시대 주류였던 요시가와 에이지(吉川英之)의 번역본과 1970~80년대 출간된 번역본은 대만 삼민서국출판사의 <삼국연의>를 원본으로 삼았는데, 두 가지 모두 명대 나관중의 원본을 청대 모륜(毛綸), 모종강(毛宗崗) 부자가 당시 독자들의 취향에 맞게 고쳐쓴 <모종강본>을 원본으로 한 것이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중국 본토의 출판물을 국내에 반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황석영 번역본은 처음으로 1999년 상하이 강소고적(江蘇古籍) 출판사에서 출간한 <수상삼국연의>를 원본으로 삼았다. 이는 <모종강본>의 많은 오류를 바로잡은 충실한 텍스트로 평가받고 있다.

번역을 마친 황석영씨는 600년 동안 한-중-일 동북아시아 3국의 독자를 웃기고 울린 이 책의 매력에 대해 “역시 <삼국지>를 읽는 맛은 가슴이 썰렁해지도록 밀려오는 사람의 일생이 덧없다는 회한과, 그에 비하면 역사는 자기의 흐름을 갖고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옳고 그름을 판결하게 된다든가, 조금 주어진 생이지만 사람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반성 등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