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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기자'로 살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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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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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나가던 문화부기자 조선희씨, 그가 <씨네21>창간을 위해 치른 수많은 전투들

대체로 성공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는 독자들에게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을 남긴다. ‘그래, 나도 부딪혀보는 거야’ 하는 떨리는 자극과 ‘그래, 성공은 아무나 하냐’ 하는 자조감이다. 지은이가 탄 운명의 배가 풍랑을 만나고 좌초할 때는 자신의 형편과 포개지다가도 대해를 가로질러 신대륙에 깃발을 꽂는 순간에는 한없이 멀어보인다. 여성이 읽는 여성의 성공담은 더욱 그런 느낌이 강하다. 남성 중심의 위계사회에서 당당하게 밀고 나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책표지에서 여유있는 미소를 띠고 있는 주인공을 보면 동지애가 느껴질 때보다는 위축감이 느껴질 때가 더 많다. 세상은 여성에 여전히 적대적이고 여성이 성공에 이르는 거리는 남성의 것보다 훨씬 길기 때문일 것이다.

“슈퍼우먼은 되지 말라”

95년 영화주간지 <씨네21>을 창간하고 5년 동안 편집장을 해오다 지난 봄 은퇴한 조선희(40)씨가 쓴 <정글에선 가끔 하이에나가 된다>(한겨레신문사 펴냄)도 넓게 보면 한 여성의 성공담에 들어갈 수 있는 에세이다. <연합통신>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한겨레신문> 문학담당 시절 팬군단을 거느린 기자로 활동했던 조씨는 아무도 성공을 예측하지 못한 <씨네21>을 창간 3년 만에 전체주간지 시장의 독점적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 책은 여느 성공담처럼 화려하지 않다. 지은이는 주변의 비협조와 냉소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용감하게 간난신고의 터널을 뚫고 나왔나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다. 여성이 가뭄에 나는 콩보다 드물었던 80년대 초반 언론사에 입사해 겪었던 좌절과 보람, 일주일에 이틀 동안 밤샘을 하면서 일하는 동안 아이의 이가 엉망이 될 때까지 무심했던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등이 담백하게 서술되는 이 책은 ‘나는 어떻게 성공했나’보다는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기자 입문 시절 그는 뭘 어떻게 해볼 수도 없었던 영안실의 시체를 혼자 들여다보면서 여자도 남자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분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원했던 경제부가 아닌, 당시만 해도 여성용 부서 가운데 하나인 문화부에 발령받았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결국 굉장한 행운이었지만 그때 선배들을 몹시 원망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결국 당대 최고의 문화부 기자가 되고 당대 최고의 잡지를 만들어놓은 뒤 무대에서 내려왔지만 환송회 때 이른바 신문사의 엘리트 코스를 거친 한 남자동료와 자신의 현재를 비교하면서 ‘은퇴’가 아니라 ‘조퇴’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솔직한 고백을 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인생의 후배인 젊은 여성들에게 ‘슈퍼우먼이 되지 말라’고 다독인다. 각종 고지서를 챙기지 못하는 주부로서의 ‘게으름’ 때문에 집안의 전기가 나가고 자동차 번호판이 떼어지는 등 당했던 수모를 덤덤하게 말투로 소개한다. 그는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서는 전통적이라 할 만큼 옹호하면서도 가족관계란 ‘세상의 그 수많은 가치들 가운데, 중요하지만 하나의 가치일 따름’이며 ‘단 한번인 (인생의) 기회를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소진한다는 건 억울한 일’이라고 충고한다.

인간적 갈등에 대한 솔직한 고백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하루에도 여러 번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잡지를 탄생시켜 정상에 올려놓은 과정이다. 그는 <씨네21>에서의 5년을 “콜로세움 속의 검투사, 그것도 콜로세움에 출정해서 칼쓰기의 기본을 배우는 검투사였다”고 표현한다. 영화기자를 2년 했지만 ‘비즈니스’에서는 문외한이었던 상황에서 창간 프로젝트를 맡은 것은 무모한 자신감으로 호랑이굴에 들어간 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기자가 밤샘 마감 뒤 쓰러져 119구급대에 실려가는 걸 보면서 그의 가슴을 기습한 절망도 '못말리는 승부근성'만큼은 꺽지 못했다.

지은이가 말하는 성공의 소항목 가운데에는 “나와 우리 기자들이 패잔병에다 실업자가 되지 않는 데 성공한 것”이 들어가 있다. 우습기도 하지만 ‘한국영화사업과 영화관객이 고급영화주간지를 갖는 데 성공한 것’보다 훨씬 절절하게 들린다. 또한 지은이가 조직의 ‘보스’가 되면서 승승장구보다는 그동안 겪었던 인간적인 갈등과 상처를 솔직하게 풀어놓는 이야기도 재미있다. 창간 당시 그를 힘들게 했던 경영관리자의 아집을 불현듯 자신의 그림자에서 발견할 때 느꼈던 쓸쓸함, 그래도 합리적이고 다정한 선배라고 자부했던 자신에게 벽을 느끼는 후배들을 보면서 느꼈던 소외감들을 덤덤한 목소리로 고백한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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