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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책/ 육체, 무궁무진한 상상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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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10-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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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예술의 동력은 여성의 몸에 대한 엿봄의 욕망… 육체를 주체로 보는 새로운 시각도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신격화된 다비드의 육체는 이상에 몸바친 남자의 육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 여기에서 ‘나’는 육체가 아닌 ‘정신’이었다. 육체는 정신만큼 확실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육체없는 정신이라는 근대적 에피스테메(지식, 인식)가 발생한다. 정신-육체의 이원론이 중세 말의 영육이원론이 세속화한 형태라고 볼 때, 육체를 경멸하는 근대적 전통은 근대의 전유물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서양 형이상학 전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근대라는 시대에 그것이 급진성을 띠고 나타난 것은 사실이다. 근대적 정신-육체의 이원론 속에서 육체는 정신의 ‘타자’가 된다. 육체는 내 속에 들어온 자연, 즉 내가 아닌 나이다. 여기서 정신은 인식의 ‘주체’, 육체는 인식의 ‘대상’이 된다. 전통적으로 인식의 행위가 ‘시각’의 이미지로 표상되어 왔다면, 인식이란 곧 정신의 눈으로 육체를 훔쳐보는 절시증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학적 탐구는 사물의 옷을 벗겨 진리를 빛 속에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졌다.

사실주의와 ‘옷 벗기기’


유럽 문화에서 진리라는 낱말은 그 문법적 성과 일치하는 여성으로 표상된다. ‘바라보는 남성의 눈-보여지는 여성의 육체’라는 도식은 지적인 영역만의 현상이 아니라 근대 서양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에피스테메였다. 피터 브룩스의 <육체와 예술>(이봉지·한애경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2만2천원)은 이 가설을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실험해보는 책이다. 여기서 저자는 “인간의 육체가 서사적 글쓰기의 대상 및 동기이자 상상력의 1차적인 관심사”라는 관점에서 18세기 이후 서양의 문학과 미술사를 조망한다. 이렇게 예술사를 육체의 관점에서 조망하는 기획은 아날학파의 새로운 문화사, 의학/형벌/성을 다룬 푸코의 계보학, 그리고 최근의 페미니스트 저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여기에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방법을 덧붙여 저자는 18세기 이후의 문학사가 여자의 육체를 드러내는 욕망에 의해 추동되어 왔음을 밝힌다.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남의 사생활의 공간을 들여다보려는 절시증적 욕망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예술 속에 나타난 육체는 자웅동체적 혹은 유동적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여성의 나체란 예술의 주제로 나타나지 않았다. ‘나체’는 영웅주의적 남성의 상과 결부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여성의 눈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영웅주의적 남성의 신체를 바라보는 시각은 아직 성적 구별이 없는 중성적인 시각이었다.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을 주체로 놓고 여성의 몸을 응시의 대상으로 놓는 문학적 나체화의 전통은 18세기 말, 19세기 초의 사실주의와 함께 시작된다. 사실주의적 시선은 중성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히 성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인간과 육체를 정의할 때에 남녀의 성구별이 본질적 요소의 하나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가령 <보바리 부인>에서는 환유와 제유를 통해 그녀의 육체를 하나하나 벗기는 과정이 서사의 추동력이 된다. 로만 야콥슨이 산문의 특징으로 든 환유와 제유로 여성의 육체를 묘사하는 사실주의적 방법을 저자는 재치있게 페티시즘의 성욕과 연결시킨다. 여기서 여성의 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여성이 착용한 옷가지에 대한 묘사를 통해 암시되고, 그러는 한에서만 소설은 줄거리를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졸라의 <나나>에서 볼 수 있듯이 자연주의 계열의 소설에서는 여성의 옷을 노골적으로 벗기기 시작하나, 이때조차도 창녀는 완전히 벗기고 양갓집 규수의 베일은 그대로 보존된다. 여기서도 여자의 육체는 완전하게 재현할 수 없는 것으로 남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여자의 성기는 가장 신비롭고 강력한 서술적 원동력이 된다. 여성의 몸을 벗기려 하나 결국 성기 앞에서 멈칫거리고 마는 이 현상을 저자는 정신분석학적 방법에 의거하여 소년이 지어낸 유아적 시나리오와 연결시킨다. 말하자면 “여자가 단순히 거세된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 차이를 남근의 결여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소년, 그리하여 “(여성의 성기가 무엇인지) 나도 알아요. 하지만…”이라고밖에는 설명하지 못하는 소년의 시나리오의 연장이라는 것이다.

(사진/발레는 이야기를 전하는 육체를 보여준다(맨위).프랑켄슈타인은 전통에서 벗어난 괴이한 육체의 이야기다)

이렇게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놓고 남성의 눈을 주체로 놓는 고약한 남성 위주의 전통은 문화의 영역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 고약한 전통이 하필 인간의 해방을 가져와야 할 계몽주의와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가령 프랑스 혁명기에 “남성들이 군중 앞에 나서면 정치가가 되지만 여성들이 군중 앞에 나타나면 창녀 취급을 받았다.” 혁명의 적인 마리 앙투아네트만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혁명의 친구인 여성운동가들 역시 상스런 평민여성들로부터 글자 그대로 뭇매를 맞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당시의 남성 문필가들에게 이들은 여성의 미덕을 잊고 자연에 어긋나는 짓을 하는 여자들로 묘사되었다. 그 유명한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에서 “인민의 친구” 마라의 가슴에 새겨진 칼자국은 순교한 남성의 육체에 각인된 여성의 성기를 의미했다. 여기서 여성은 남성의 적이자 혁명의 적으로 간주된다. 뒤에 치명적 여인(femme fatale)이라는 불리는 현상은 처음에는 이렇게 정치적인 맥락에서 형상화했다.

대상으로서의 육체를 거부하라

(사진/영화 <연인> 원작 소설의 지은이 뒤라스는 육체의 전통적 이미지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전통 안에서 전통을 뒤바꾸며 미묘한 변화를 줬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이런 근대적 시각과는 다른 관점에서 육체를 바라보는 시도들을 소개한다. 가령 타이티의 여인들을 즐겨 그렸던 고갱은 남성의 시각의 응시 대상인 살롱식 ‘비너스’ 대신에 아직 선악의 구별이 기입되지 않은 ‘이브’라는 이름의 원시적 육체를 그리려 했다. 메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몸을 통하여 언어화를 거부 혹은 초월하는 육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엘리엇과 프로이트는 여성의 ‘히스테리’ 현상에 주목함으로써 육체를 단순한 ‘응시의 대상’이 아닌 ‘말을 하는 주체’로 바라보는 관점을 도입했다. 말하자면 단순히 육체를 관찰하기보다는 거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뒤라스의 <연인>은 수동적 입장에서 벗어나 자신을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에로스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이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여성의 상을 제시한다. 이로써 응시하는 남성과 응시당하는 여성이라는 전통적 틀과는 달리 능동성/수동성의 구별을 복잡하게 만드는 새로운 모델이 등장한다.

육체란 전(前)문화적, 전(前)언어적 현상이다. 동시에 그것은 사회적 언어적 구성물이다. 육체는 정신적 갈등이 각인되는 장소이자 인간상징의 원천이다. 어쩌면 육체란 전언어적 현상으로서의 몸이라는 근원에서 퍼올린 것을 담론에 의해 끊임없이 언어화해 사회적 현상으로 제시하는 메커니즘인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에 루소에게 매질을 했던 가정교사는 그의 엉덩이에 그의 생애를 좌우할 성적 코드를 기입한다. 카프카의 소설 속에서 사형수의 몸에는 자동기계의 바늘로 “상관에 복종하라”는 글자가 새겨진다. 여섯 시간에 걸친 처형의 고통 속에서 그는 이 말의 의미를 배우게 된다. 굳이 문신을 새기지 않아도 육체는 그 자체가 텍스트다. 이 텍스트를 읽는 오래된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육체를 이야기의 주체로 만들려는 새로운 시도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육체는 반복적 글쓰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책 역시 그 시도 중 하나이며, 그 주로 쓰여진 책 중에서 역작으로 꼽을 만하다.

진중권/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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