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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은행잎이 기억력을 되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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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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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출물의 인지능력 향상 효과 증명되지 않아… 혈액순환 개선 비롯한 생물학적 효과 많아

지난해 가을 한 제약회사 부설 생명과학연구소에 근무하는 최아무개씨는 동료들과 함께 ‘효도선물’을 특별 제조했다. 은행잎으로 혈액순환촉진제를 만들었던 경험이 있던 최씨가 주도한 것이었다. 은행잎은 노랗게 물들기 직전의 것을 미리 마련해 그늘이나 급속탈수법으로 말린 뒤 여러 공정을 밟았다. 최씨와 동료들은 그런 식으로 은행잎 추출물을 만들어 부모와 친지들에게 선물했다. 요즘도 최씨는 가로수로 조성된 은행나무를 볼 때마다 효도선물을 떠올린다. 올해는 입소문까지 나서 은행잎을 훨씬 더 많이 모아야 한다. 그래도 자신이 만든 은행잎 추출물이 건강식품으로 각광받으며 기억을 되살리는 묘약으로 여겨지는 게 즐겁기만 하다.

인지 지능 관련 실험 결과 엇갈려

사진/ 은행잎 추출물의 인지능력 향상 효과는 입증되지 않았다. 은행잎은 혈액순환 개선을 통해 뇌기능에 이바지한다.
이미 수세기 전부터 중국 의학에서 은행잎 추출물을 사용해왔다. 미국·유럽 등지에서도 은행잎 제제 시장은 연간 10억달러 이상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 얼마든지 상품을 구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최씨가 실험실에서 어깨너머로 배운 은행잎 추출물 제조법으로 효도선물을 만드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의 할아버지가 노인성 치매인 알츠하이머병으로 오래 고생하다 돌아가셨고, 큰아버지와 고모도 같은 병을 앓고 있다. 그로서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갈수록 건망증이 심해지는 것을 은행잎 추출물로 막아드리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은행잎은 기억력, 학습능력, 기분 등에 관한 인지 기능을 높여주는 물질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정말로 은행잎 추출물이 기억력 복원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것일까. 독일 의약 당국은 은행잎 추출물을 치매에 사용하도록 했고, 미국 국립노화연구소도 알츠하이머병에 관한 은행잎 효과를 평가하는 임상실험을 지원하고 있다. 은행잎이 뇌 기능 향상에 이바지한다는 실험 결과가 속속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오리건대학 배리 오켄 연구팀은 은행잎 추출물이 뇌의 특정 뉴런 간의 신호 전달 물질인 아세틸콜린의 분해를 억제해 뇌의 활성화를 강화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중추신경계에 발생하는 질환인 다발성 경화증 환자의 인지능력 향상에도 은행잎 추출물이 효과를 발휘한다는 미 캘리포니아대 샌디에이고 의대 조디 코리블룸 박사팀의 연구 결과도 나왔다.

최씨는 은행잎이 인체에 유용하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실제로 은행잎에 있는 플라보노이드는 혈관 확장을 촉진해 뇌에 공급되는 혈류의 양을 증가시켜 혈압을 낮춘다. 뇌졸중의 위험을 줄이는 것이다.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춰 알츠하이머병의 발병 위험을 줄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뉴런을 손상시켜 노화에 따른 뇌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활성산소의 생성을 억제하는 효과도 있다. 은행잎은 신경전달물질 시스템에도 깊은 영향을 끼친다. 세로토닌에 반응하는 뉴런 수용체의 퇴화를 늦춰 스트레스와 불안을 감소시키고 신경전달물질인 GABA의 분비를 촉진해 불안을 없애는 구실도 한다. 쾌감을 느끼는 중격의지핵이나 운동을 조절하는 소뇌에서 포도당 흡수가 원활하게 이뤄지도록 한다.

이렇게 은행잎은 뇌의 기능 개선에 이바지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은행잎이 기억력을 비롯한 인지능력을 향상시키는지 여부를 단언하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실험 결과가 항상 일치하지 않아 섣불리 임상 결과를 판단하기 어렵다. 건강한 성인의 경우 은행잎이 정신력 향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미국 윌리엄스대학 심리학과 폴 솔로몬 교수팀은 기억력 손상이 없는 60살 이상의 노인들에게 파머튼사에서 개발한 건강보조식품 ‘깅코바’(Ginkoba)를 복용하도록 했다. 이 실험에서 노인들의 기억력과 주의력 등이 개선되었다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때론 은행잎의 효과가 지속되지 않고 처음 복용 당시에만 반짝 나타나 은행잎 추출물의 생물학적 효과마저 의심받는 경우도 있다. 건강한 사람들이 120~240mg을 복용할 경우 건강상의 위험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보다 많이 복용할 경우 대부분의 식물 추출물이 그렇듯 매스꺼움이나 구역질 혹은 갑자기 혈압이 낮아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기억력만을 생각한다면 효과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은행잎 추출물보다 단당류(포도당·과당·갈라토오스 등)를 복용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예컨대 포도당을 전신에 투여할 경우 사람의 인지능력을30~40%가량 향상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포도당의 경우 복용량이 중요하다. 너무 많거나 적으면 오히려 기억력을 손상시키기도 한다. 게다가 적절한 복용량이 사람에 따라 다르기에 조심해야 한다.

당신은 망각 없는 세상을 꿈꾸는가

노년기에 뇌졸중·뇌종양·약물중독 증상이 없는데도 기억력이 급격히 떨어지면 알츠하이머병을 의심해야 한다.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뇌의 정교한 회로에 끈적끈적한 플라크가 쌓이거나 신경세포가 꼬이고 뇌에서 기억처리를 담당하는 해마 부분이 줄어든 탓이다. 최근 양전자단층촬영(PET) 영상기술이 도입되면서 뉴런 활동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뇌에 에너지를 공급하는 포도당을 관찰하는 PET는 뇌의 상태로 기억력이 떨어질 조짐까지 미리 파악할 수 있다. 지금까지 의문으로 남아 있던 은행잎 추출물의 기억력 증진 효과도 PET를 통해 검증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은행잎 추출물을 복용했을 때 뇌의 활동을 손쉽게 추적할 수 있다.

머지않아 의사들이 내시경으로 위를 살펴보는 것처럼 뇌의 상태를 확인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잃어버린 기억을 복원하는 것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 얼마 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학습 및 기억현상 연구단 신희섭 연구원은 학습과 기억 능력에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를 발견했다. 특정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제거하면 신경세포에서 기억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칼슘이온 농도가 그대로 유지돼 망각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굳이 효과가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은 은행잎 추출물을 사용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고민거리는 남는다. 기억력이 좋으면 아픈 기억들이 없어지지 않아 감염된 상처처럼 영혼을 갉아먹을 수도 있으니까.

김수병 기자 helli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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