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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평화의 사도라 불러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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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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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요코의 예술세계 재조명하는 회고전 열려… 존 레논에 가려진 전위예술가의 진면모 보여줘

6월21일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 ‘예스 오노 오코’(9월14일까지) 개막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오노 요코(70)는 사진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가냘프고 작았다. 그리고 젊었다.

‘존 레논을 홀린 기괴하고 억센 동양 마녀’라는, 미국과 유럽 언론이 만들어 그에게 붙여준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차분하고 상냥하고 조용한 말투도 의외였다. 그러나 오만하게도 보일 만큼 자의식 강하고 당당한 표정이나 선글라스 너머로 언뜻 엿보이는 반짝이는 눈빛은 그를 훨씬 복잡하게 보이게 했다. “1964년에 출판한 첫번째 작품집 제목이 오렌지와 레몬의 합성인 ‘그레이프 푸르트’였다. 그레이프 푸르트는 동서양의 두 문화를 아우르는 하이브리드(혼성·잡종)로서의 나와 잘 어울린다. 나는 나의 그런 면이 좋다”고 그는 말했다.

일본 재벌가의 딸로 전위예술 선도


사진/ “예술은 황폐한 세상에서 결핍된 사랑을 채우는 언어다.” 오노 요코는 예술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꿈꾸고 있다.
40년 동안 시대의 상징, 뉴스의 초점으로 살아온 여자,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사진기자들을 전시장 곳곳으로 이끌고 다니며 포즈를 취하고, ‘푸른 방’이라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작은 방 곳곳에 글씨를 쓰는 퍼포먼스를 벌이면서 그는 그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오노 요코는 평생 스포트라이트에 익숙한 사람이다. 패전 이전 일본 4대 재벌가였던 야스다 가문의 딸로 태어나 최고의 귀족 교육을 받았고, 중·고등학교 과정으로 다녔던 가쿠슈인(學習阮)에서 그의 동기는 현재 일본 왕인 아키히토와 작가 미시마 유키오다. 1953년 아버지를 따라 뉴욕으로 갔고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57년 가난한 피아니스트를 만나 결혼했다. “당시 나는 일본의 가식적으로 세련된 척하는 부르주아 계급에서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굉장히 독립적이었고 나 스스로 부르주아로부터 분리된 지식인이 되고자 했다.” 50년대말부터는 존 케이지, 백남준 등과 함께 전위예술 그룹 ‘플럭서스’의 중심 인물로 주목받았고, 존 레논을 만나기 전 이미 명민한 아시아 출신의 여성 예술가였다. 결국 서양에 나가서 ‘차별 받는 소수 유색인종’으로서 자신을 주장할 수 있는 이들은 비서구 나라의 부유한 최고의 엘리트들이다.

이번 전시는 존 레논의 일본인 부인이라는 거대한 포장에 가려진, “모든 사람이 그의 이름을 알지만 아무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전위 예술가로서의 오노 요코의 예술세계를 재조명한 회고전이다. 요코가 ‘플럭서스’에서 작업하던 60년대 초부터의 작품들을 연대 순으로 보여준다. 초기의 개념적 글씨 작업부터 <자르기> 등의 퍼포먼스, 레논과의 반전 평화운동 이벤트, 관객 참여 예술을 지향했던 작품세계 등 설치와 오브제, 비디오, 영화작품, 사진자료 등 126점이 전시된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처음 만나는 것은 1966년 런던 인디카 갤러리에 전시됐을 때 존 레논이 이 작품을 보고 요코의 작품세계에 반했다는 <예스 패인팅>이다. 사다리에 올라가 천정에 있는 액자를 꼼꼼히 살피면 작게 씌여진 ‘예스(yes)’를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과 이번 전시의 제목을 ‘예스’라고 한 것에 대해 그는 “인생에 대한 예스, 사랑에 대한 예스, 평화에 대한 예스다. 삶 자체가 긍적적이라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사진/ 1971년 에버슨 미술관 회고전을 위해 처음으로 제작되었던 작품 〈경이〉. 이 작품은 빛에 대한 관심을 실물로 완성한 것이다.

동양 마녀라는 닉네임, 그 너머의 진실

관객이 지시문을 보고 <저녁 햇빛이 통과하는 그림> <연기 회화> <머리속에서 만들어지는 회화> 등 작품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도록 개념을 적어 놓은 <지시문(instructions)>, 방안의 모든 가구를 절반으로 잘라내 관객이 그 나머지를 상상해서 채우도록 하는 <방의 반(Half-a-Room)> 등 초기 작품들을 지나면 만나는 60년대 작품들은 그녀를 페미니스트 작가로 논란의 중심에 서게 한 사회적 발언이 강한 것들이다.

가장 유명한 작품인 <자르기(cut piece)>는 오노 요코가 무대에 앉아 있고 관객들이 나와 가위로 그녀의 옷을 조금씩 자르는 장면을 공연하는 작품,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적인 폭력, 그것을 침묵으로 참도록 강요하는 사회에 대한 은유다. 당시 요코는 비백인 아시아 여성으로서, 또 가부장제의 굳은 질서를 교란하는 ‘마녀’로서 논란과 비난, 찬사의 대상이었다.

이밖에 60년대 작품으로는 존 레넌과 함께 한 <평화를 위한 침대 시위(Bed-In for Peace)>, 그들이 세계 곳곳의 광고판에 써붙인 <당신이 원하면 전쟁은 끝난다(War is over, If you want it)> 등 우리에게 익숙한 반전평화 이벤트 모습들도 나와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50살이 됐을 때 지금까지는 내 인생의 서막이었다고 생각했다”며 “최고의 작품은 앞으로 나올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이번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가 50살 넘어 만든 최근작들이 자리하고 있다. 90년대 작품 <무게 오브제. No.5(Weight Object No.5)>는 저울의 양쪽에 가족 사진과 권총을 놓아 레논의 죽음이 자신의 가족에게 미친 비극을 표현했다. 체스판과 말의 모든 색깔을 지우고 흰색으로 칠한 <신뢰를 갖고 하시오(Play it by Trust)>는 “게임의 룰이 모두 사라졌을 때 어떻게 게임을 할까”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60년대와 70년대의 상징이었고,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실천했던 그는 여전히 그 신념을 간직하고 있었다. 인터뷰에서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사랑’ ‘평화’ ‘세계’ ‘소통’이었다.

사진/ 〈평화를 위한 침대 시위〉(1969) 앞에 선 오노 요코. 성애적 사랑과 세계 평화에 대한 염원을 베트남전 종결운동에 담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예술의 힘

자신의 예술에 영향을 끼친 사건이나 사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세계(The World)”라고 답했고, 예술이 무엇이냐고 묻자 “다음 세계를 더 나은 세계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황폐해졌지만, 예술은 그 결핍된 사랑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다. 현대미술이 멀티미디어, 설치 등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했지만 본질은 모두 관객과의 소통을 위한 것이다”라고 열정적으로 말했다.

그는 2003 베니스 비엔날레에 자신이 출품한 <이매진 피스>의 일부분인 ‘평화를 상상하라(imagine peace)’라고 쓰인 작은 단추를 보여줬다. “비엔날레 전시장에 세계지도를 걸고 평화가 정착되기를 원하는 나라에 관객들이 고무 도장으로 ‘평화를 상상하라’고 찍도록 했다. 어려움과 난관이 많은 시대에 때로는 좌절하기도 하지만 나는 언제나 씨앗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씨앗이 자라면 큰 나무가 되듯이 여러분의 작은 노력과 나의 작은 노력이 만나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서로 존중하고 평화롭게 살아가리라 믿는다.” 존과 요코가 불렀던 <이매진>의 한 구절 같았다.

글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사진 김진수 기자 js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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