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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어찌 분단을 잊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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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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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비극적 상흔 간직한 민통선 보고서… 총성 없는 전장의 실체를 글과 사진에 담아

기억을 더듬어보면,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대절한 버스를 타고 단체로 구경해야 했던 ‘북괴 땅굴’과 동해에 갔다가 잠깐 들른 통일전망대가 민통선(민간인통제선) 안에 들어간 단 두번의 경험이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한 사람들에게 민통선이나 비무장지대란 대략 이 정도의 의미를 지니며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다.

『민통선 평화기행』이시우 지음, 창작과비평사 펴냄
사진가이자 평화운동가인 이시우(37)씨가 내놓은 <민통선 평화기행>은 그 민통선 안에 있는 철원과 강화, 연평도와 백령도, 파주, 화천, 양구, 연천, 고성을 역사가 숨쉬고 사람이 살고 있는 현실의 땅으로 되돌려놓는다. 그가 찍은 160장의 아름답고 쓸쓸한 사진들은 매혹적이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 역사와 문학, 자료들에서 건져올린 현대사의 이면은 비극과 상처로 얼룩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쨌든 우리는 민통선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다.

발로 추적한 민통선의 사람과 역사·문학


이시우씨가 민통선 곳곳을 발로 누비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이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뒤 제적되고, 공단거리와 시위현장에서 떠돌다 동료들이 모두 떠난 뒤 그는 세찬 바람 부는 겨울 철원평야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아프지 않은 아름다움도 있다더냐”는 목소리를 들은 그는 놓았던 사진기를 다시 들고 비무장지대와 친해져 갔다.

그가 답사를 시작한 철원은 통일을 지향했던 궁예의 황성터가 있던 곳이며, 근대에는 인근 최대의 철원장이 번성했던 곳이다. 빈부격차가 컸던 이곳에서 일제시대 몰락한 농민들은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고, 많은 청년들이 사회주의자가 돼 독립운동에 나섰다. 강화의 고인돌 이야기, 백령도와 연평도에 자취가 남은, 서해의 해상경제권을 기반으로 활약했던 임경업 장군 이야기 등 그가 술술 풀어내는 역사 이야기는 귀를 잡아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종전이 아닌 정전협정” 체제에서 반세기 동안 살아온 우리에게 “분단이란 생활 속으로 들어온 전쟁”임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비무장지대 남쪽으로만 100만개, 후방지역에 7만개 이상이 매설돼 있는 대인지뢰. 그는 파주·연천·양구·고성 등 민통선 곳곳에서 피해자들을 만난다. 한 노인이 향기에 취해 지뢰밭에 들어갔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간 연천에선 지은이는 들꽃 한 송이가 지뢰에 기댄 채 피어 있는 광경을 처연한 사진 한장으로 기록했다.

대인지뢰 사이로 세균폭탄이 떠돌아

이라크 전쟁 때 미국이 사용했던 열화우라늄탄. 원전연료를 만들면서 나온 폐기물로 만들어 수많은 사람들을 백혈병과 암, 기형의 고통으로 몰고 간 이 공포의 무기가 1997년 사고로 연천에서 터졌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또 68년 휴전선 인근에선 군인들이 상부의 명령에 따라 분말 상태인 고엽제 모뉴논 8만ℓ를 손으로 뿌렸다는 것은 지금도 이 지역은 거의 민둥산이며 당시 군복무했던 이들과 그들의 아이들은 이름 모를 병으로 앓고 있다. 비무장지대에서 발생해 매년 전국을 공포에 떨게 하는 유행성출혈열은 군사 목적으로 온갖 세균을 잡종교배해 만든 세균폭탄에서 비롯됐다.

정전협정 50주년인 올해 한반도의 미래는 북핵위기와 전쟁위기설, 경의선·동해선 연결, 대북송금 특검수사로 혼란 속에 휩싸여 있다. 그는 함께 민통선을 찾아간 이들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보면서 민통선을 기행하는 것 자체가 분단 극복을 위한 작은 실천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알고 새롭게 꿈을 꾸는 것이 평화의 시작일 것이다. “비무장지대는 무기를 가지고는 못 들어가는 곳이라/우리는 총을 버리고/군복을 벗고 들어간다’는 문익환 목사의 시 <비무장지대>처럼 한반도의 화약고로만 알려진 이곳은 평화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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