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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구천을 떠도는 피폭자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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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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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검마저도 차별받는 조선인, 그 통한의 역사를 재현한 한수산의 장편소설 <까마귀>

모든 과거는 역사로 기록되지 않는다. 과거의 일부분이 역사로 기록될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숱한 과거 중에서 ‘기억되는’ 과거만이 역사의 현장으로 호출되거나 편입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려는 인간의 의지보다 강렬한 건 과거를 아예 잊어버리려는 망각과 과거를 비트는 왜곡의 욕망이다. 인간은 그들이 속한 환경과 처지에 따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과거를 망각하거나 왜곡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본 자민당 소속의 한 정치가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조선인이 원해서 창씨개명을 하게 된 거”라고.

한국판 <쉰들러 리스트>라 불러다오

사진/ 한수산은 조선인 피폭문제를 정면에서 다루었다. 이를 위해 그는 현장을 발로 누비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류우종 기자)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작가에게는 도처에 산재한 망각과 왜곡의 욕망과 싸우면서 과거를 사심 없이 되돌아보는 성찰의 힘과 이 성찰을 한편의 의미 있는 서사로 만들어내는 지혜가 있다. 한수산의 장편소설 <까마귀>도 바로 이런 지혜가 투영된 사례이다.


민족과 국민국가의 해체를 자명한 진리처럼 여기는 독자들에게 <까마귀>는 시대착오적 소설로 읽힐 수도 있다. 또 코카콜라 라이트처럼 문학에도 라이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까마귀>는 민족 수난이라는 구태의연한 플롯을 반복하는 무거운 소설로 읽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을 뒤로 돌리고 먼저 경청해야 하는 질문이 있다. 왜 우리는 민족의 수난과 유랑, 이산의 체험을 감동적으로 재현한 작품을 소유하지 못한 걸까?

장르가 다르기는 하지만 유대인 출신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유대인의 수난과 이산의 고통을 다큐멘터리적 방식으로 충격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량학살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부활시켜놓았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우리들의 <쉰들러 리스트>가 없었다. 처절할 정도로 패자의 입장에서 전시동원 체제 아래 조선인들이 겪은 수난, 유랑, 이산의 고통을 조명한 작품의 예를 우리는 별로 알지 못한다. 이런 정황에 비추어보자면, <까마귀>의 출간 의의는 간단치 않다.

<까마귀>는 독자들을 나가사키 항구에서 서남쪽에 위치한 작은 섬 하시마로 안내한다. 하시마에서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을까? 섬 전체가 해저 탄광인 하시마는 조선 본토에서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 노무자들의 통한이 아로새겨진 현장이었다. 폭력적인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이 작동하는 공간이었으며, 이로 인해 조선인 노무자들이 대책 없이 희생된 살육의 장소였다. 요컨대 하시마는 식민본국인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불행한 관계를 조명해주는 은폐된 역사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국내 독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하시마의 은폐된 과거를 생생하게 되살려내는 데 바쳐진 작가의 공력은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하시마 탄광에 끌려간 동포들에 대한 취재와 인터뷰, 해당 자료들을 섭렵하는 노력이 없었다면 한수산은 하시마의 과거에 접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난의 흔적 찾아 15년 동안 진실 추적

그가 일본으로 떠난 것은 올림픽 개최로 온 나라가 달아오르던 1988년 8월이었다. 낯선 땅에서 구체적 체류계획도 없이 아내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딸을 데리고 무작정 현해탄을 건넌 것은 “노태우가 대통령 하는 나라에선 더 이상 못살겠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81년 일간지에 연재하던 <욕망의 거리>가 국가원수를 비방하고 군인을 비하하며 기성세대의 원칙과 질서를 깔봤다는 이유로 보안사에 끌려가 일주일 남짓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는데, 당시 그 필화사건의 총책임자였던 노태우 보안사령관이 대통령이 되자, 그만 남한에서 정붙이고 살아갈 ‘마음의 끄나풀’이 아예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은 한수산에게 다시 펜을 쥐어야 할 이유를 마련해주었다. 재일동포 3세의 삶에서 가졌던 관심이 그들의 아버지, 또 그 아버지로 거슬러올라가 한국인 피폭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사진/ 한수산의 장편소설 〈까마귀〉는 과거에 대한 성찰을 통해 오늘의 지혜를 터득하도록 한다.
피폭자 취재를 위해 나가사키를 찾았던 때가 1990년 여름.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오늘 한수산은 조선인 노무자들의 애환과 고통, 고향과 가족을 향한 짙은 그리움, 탈주와 실패, 저항과 탄압 등의 조선인 수난사를 총 다섯권 분량으로 재현하고 있으니 <까마귀>는 한수산 특유의 문학적 재능이 만들어낸 성과이기도 하지만 현장을 발로 뛰고 탐문한 노력의 성과이며,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주검마저 차별받았던 한국인들의 통렬한 아픔을 방관할 수 없다는 작가적 의무의 성과라고 하겠다.

한수산은 이 소설에서 조선인들의 수난과 함께 수난에 좌절하지 않고 고국으로 되돌아가려는 수난 극복의 의지를 동시적으로 조명한다. 조선 본토에서 강제적으로 차출된 조선인 노무자들이 하시마 탄광에서 겪는 수난은 한두 사람의 개별적 수난이 아니라 민족 전제의 수난으로 이해되어도 무방하다. 하시마 탄광에서 위안부로 일하는 금화, 강제노역 중에 금화를 사랑하게 된 우석, 친일파의 자식 지상, 명국 등이 체험하는 수난은 민족 수난을 심화하는 은유가 되고 있다. 하시마 탄광에 끌려온 조선인 노무자들은 그들의 신분과 출생 지역, 나이와는 상관없이 단지 그들이 식민지 조선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억압적인 전시체제에 동원되고 있다는 것을 작가는 일관되게 서술하고 있다.

더욱 주목해야 하는 건 작가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조선인들의 수난을 오히려 고양하는 서사적 사건으로 설정한다는 데 있다. 미군이 주도한 원폭 투하로 예기치 않게 많은 조선인 노무자들이 죽을 수밖에 없었으며 설령 살아남았다고 해도 일본인들에 의해 테러를 당하거나 죽어서는 일본인들에게 길조로 여겨지는 까마귀떼의 먹잇감으로 버려지는 처지였기에 원폭 투하는 조선인에게 해방의 계기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까마귀>는 아프게 말해주고 있다.

하시마 탄광의 진실은 복원되는가

조선으로의 귀환을 결행하는 수난 극복의 의지를 집약한 인물은 친일파의 아들 지상이다. 어렵사리 하시마 섬을 탈출하고 신분을 숨긴 채 미쯔비시 조선소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에게 일어를 강의하던 지상은 원폭 투하로 폐허로 변한 나가사키를 뒤로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결심한다. 그리고 그 결심은 “돌아가서 젊은 아이들을 가르치자. 제 나라 글, 제 나라 말, 제 나라 풍습과 역사를 가르쳐서, 우리에게도 잃어버린 나라가 있음을, 아니 되찾아야 할 조국이 있음을 알려야 한다”는 구체적 계획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자기 가족의 안녕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친일파의 후예 지상의 변모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친일의 길을 걸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민족의 안위를 염려하는 민족주의자로 변모한 지상을 이 소설의 결말에 배치하는 작가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하시마에서의 강제노역과 탈출, 나가사키 원폭 이후 자행된 일본인들의 만행을 온몸으로 체험한 지상은 일본 제국주의와의 기회주의적 타협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귀환하려 하고 있다. 요컨대 이 소설의 결말 장면에서 독자들은 친일의 과오와 오욕을 청산하는 일이 진정한 해방의 첩경이 된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다.

소설은 지상이가 귀환을 결심하는 지점에서 끝난다. 그러나 소설이 끝난 그 지점에서 하시마 탄광의 은폐된 비극적 진실은 역사로 복원되어 생명을 얻게 되었다.

양진오 | 경주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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