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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시스템과 매뉴얼은 ‘열려라 참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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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1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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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숙의 사이언스크로키

미국의 전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은 1981년에 암살 피격을 당했지만 운 좋게도 죽음을 면했다. 그런데 한 보좌관이 문병을 오자, 레이건은 “그동안 어떤가?”라고 물었다. 보좌관은 다행히 별일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레이건은 “내가 그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나?”라고 되물었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은 흥미 있는 발언을 했다. 노 대통령은 경호도 없이 영화를 보고 나오다가 저격을 당해 사망한 올로프 팔메 전 스웨덴 총리를 예로 들었다. 그러면서 “당시 스웨덴은 계엄령을 선포하지 않고 장례를 치렀다. 이처럼 지도자의 사망에도 ‘시스템’과 ‘매뉴얼’만 있으면 그대로 돌아가는 사회를 소망한다”라고 말했다.

일러스트레이션 | 유은주
노 대통령은 한술 더 떠 청와대의 한 회의석상에서 “참여정부의 1인자는 시스템”이라 말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각종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가”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에 청와대 참모들은 “최근의 국정 혼선은 과거의 인치(人治)로부터 시스템에 의한 통치로 바뀌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이므로 너무 우려할 필요가 없다”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한 일간지의 논설위원은 이를 다시 비판하면서 “원론적으로는 국가 운영이 ‘시스템’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 다만 우리는 여전히 인치사회에 살고 있고 인치의 중심은 대통령일 수밖에 없다. 즉, 현재로서 참여정부의 1인자는 시스템이 아니라 대통령이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임기 말에는 1인자 자리를 시스템에 내주게 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위 내용을 뜬구름잡기식의 이야기로 넘기기가 쉽다. 또는 이론적으로 중대한 뜻이 있다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별 영향이 없다면 그 역시 크게 괘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정의 최고책임자와 우리 사회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것은 결코 뜬구름도 아니고 현실적 영향이 작을 수도 없다. 위와 같은 말들이 나오게 된 구체적 상황은 상당히 복잡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 요지는 “시스템이 인치에 앞서야 한다”로 모아지고 있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럴까?

시스템은 열역학에서도 핵심개념으로 쓰인다. 그런데 열역학의 주요 결론 중 하나에 우주 안의 어떤 시스템이든 홀로 고립되어 자동적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시스템은 서로 교호하면서 운행되며 견제와 균형 속에서 궁극의 평형을 찾아간다. 이것은 비록 자연과학적 결론이기는 하지만 정치 체계에서도 똑같은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가 입법·행정·사법이라는 3대 시스템 위에서 운행되는데 그 운행원리가 바로 견제와 균형이다. 그런데 견제와 균형의 상호작용은 매뉴얼만으로 되는 자동적 과정이 아니다. 만일 실제로 그런 것이 있다면 인간적 요소는 배제되어 버린다. 영화 매트릭스와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게 된다. 이른바 인치의 극단적 모습은 독재이고, 시스템과 매뉴얼의 극단적 모습은 관료주의다. 둘 사이에 갈등은 있겠지만 어느 하나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고 궁극의 이상적 평형을 추구해야 한다. 결국 이야기는 ‘인간적 시스템’을 만드는 데로 모아지며 위험요소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1인자는 역시 시스템이 아니라 인간이란 점을 되새겨야 한다.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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