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근대의 대표적 화가 치바이스의 자서전… 빈농의 아들에서 최고의 화가에 이른 인생역정
치바이스(齊白石), 마오쩌뚱의 고향으로 이제는 유명해진 후난성(湖南省) 샹탄현(湘潭縣)의 찢어지게 가난한 농가에서 1864년에 태어나 1957년 세상을 떠난 중국 근대의 대표적 화가.
이렇게 간단하게 써놓고 봐도 이 화가의 일생이 심상치 않다. 1864~1957년의 중국!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입과 약탈, 수많은 군벌들의 대립과 부패한 관료들, 끼니를 잇기 어려웠던 농민들, 신해혁명과 중국공산혁명…. 중국 역사에서도 가장 파란만장한 그 시대를 살아야 했던 농민의 아들이며 예민한 화가.
그런데 치바이스의 자서전 <쇠똥 화로에서 향내 나다>(학고재 펴냄)는 의외로 담백하고 푸근하다. “가난한 집 아이가 잘 자라 어른이 되어 세상에서 출세하기란 진정 하늘에 오르는 것만큼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그래도 늘그막에는 화가로서 자그마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라면서 이야기를 꺼낸 그는 소박한 문장으로 일생을 되돌아본다. 지식인 특유의 꾸밈과 해석, 겹겹히 둘러싼 허식이 없는 글이다.
허식없는 담백한 글로 일생 돌아봐
그의 집은 정말 가난했다. 집 근처 논 한 마지기에 의존해 다섯 식구가 살아가야 했고, 흉년이 들면 집안에 양식이 떨어져서 오랫동안 쓰지 않은 부엌 아궁이에서 개구리가 살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들로 화목했다. 할아버지는 먹고 살기 힘든 가운데도 자신이 알고 있던 300자의 한자를 열심히 손주에게 가르쳐주었고, 어머니는 곡식 낱알을 주워 모은 돈으로 그를 1년 동안 서당에 보냈다. 가난한 아이가 화가가 된 것도 먹고 사는 일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병을 앓았던 치바이스는 몸이 약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곡괭이 잡는 법을 가르쳤으나 그는 ‘너무 약했기 때문에’ 농사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열두살 때부터 목공일을 배워 목공이 됐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일감이 없는 밤이면 잔솔가지에 불을 밝혀 글을 읽고, 옛 서화집을 사다가 좋아하는 그림을 보고 그렸다. 그러다가 그림을 파는 것이 목공보다 돈벌이가 나을 것 같아 화가가 되기로 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그는 오랫동안 주위의 편견과 질시의 장벽을 넘어야 했다. 가난한 목수 출신이기에 그림은 그려도 고상한 화제(그림 여백에 쓰는 글)는 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림만 그리고 화제는 쓰지 못하게 했다. 그가 처음 화제를 쓰게 됐을 때 “모란을 부귀하다고 부러워 마소. 배와 귤의 단맛에는 떨어진다오”라면 자신을 배와 귤에 빗대어 썼다. 다양한 예술세계… 올곧은 예술혼 지녀
그는 열정적으로 예술세계를 넓혀 갔다. 그림에 시제를 쓰기 위해 시를 배웠고, 전각을 배우고 싶어 옛 글자를 배웠다. 자연을 열심히 관찰했지만, 결코 사물의 겉모습만을 모사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고,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이 전달하는 느낌을 시원하게 그려나갔다. 그의 그림에는 자유로운 붓놀림의 긴장과 힘이 가득하다. 굵은 붓으로 여백을 많이 두고 시원하게 그린 연을 날리는 목동, 석양에 홀로 걷는 소, 새우, 가마우지, 등 긁는 늙은이, 여유로우면서도 힘 있는 산과 나무와 물이 있는 풍경들과 약간은 장난끼가 어린 표정의 사람들…. 처음엔 생각없이 이 책을 집어 들었지만, 여기 실린 그의 그림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929년 당대 최고의 화가 쉬베이훙(徐悲鴻)이 우연히 그의 그림을 보고 감탄해 파격적으로 그를 북평예술전문학교 교수로 발탁하면서, 그는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중국을 대표하는 대가가 된 뒤에도 그는 관리들이나 권력자들과 거리를 두려 애썼다. 외세와 결탁한 관리들이 찾아와 그림을 사겠다고 하자 “아무리 오래 살아도 도적이 되기는 싫어. 장안에 굶어죽은 귀신 추하지 않다네”라며 물리치기도 했고, 가까운 척 하려는 권력자들을 멀리하기 위해 “바이스 노인이 심장병이 재발하여 손님을 만나지 않음”이라고 써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 중국혁명이 성공하자 치바이스는 자신이 늘 꿈꾸던 태평시대가 왔다는 기쁨으로 고향 후배인 마오쩌둥에게 감사 편지를 썼고, 새로운 중국에 대한 열망을 담은 농민들의 모습이나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 등 많은 그림들을 그렸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쇠똥 화로에서 향내 나다』 치바이스 지음, 김남희 옮김, 학고재 펴냄.
그의 집은 정말 가난했다. 집 근처 논 한 마지기에 의존해 다섯 식구가 살아가야 했고, 흉년이 들면 집안에 양식이 떨어져서 오랫동안 쓰지 않은 부엌 아궁이에서 개구리가 살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가족들은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들로 화목했다. 할아버지는 먹고 살기 힘든 가운데도 자신이 알고 있던 300자의 한자를 열심히 손주에게 가르쳐주었고, 어머니는 곡식 낱알을 주워 모은 돈으로 그를 1년 동안 서당에 보냈다. 가난한 아이가 화가가 된 것도 먹고 사는 일 때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병을 앓았던 치바이스는 몸이 약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곡괭이 잡는 법을 가르쳤으나 그는 ‘너무 약했기 때문에’ 농사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열두살 때부터 목공일을 배워 목공이 됐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일감이 없는 밤이면 잔솔가지에 불을 밝혀 글을 읽고, 옛 서화집을 사다가 좋아하는 그림을 보고 그렸다. 그러다가 그림을 파는 것이 목공보다 돈벌이가 나을 것 같아 화가가 되기로 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그는 오랫동안 주위의 편견과 질시의 장벽을 넘어야 했다. 가난한 목수 출신이기에 그림은 그려도 고상한 화제(그림 여백에 쓰는 글)는 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림만 그리고 화제는 쓰지 못하게 했다. 그가 처음 화제를 쓰게 됐을 때 “모란을 부귀하다고 부러워 마소. 배와 귤의 단맛에는 떨어진다오”라면 자신을 배와 귤에 빗대어 썼다. 다양한 예술세계… 올곧은 예술혼 지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