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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굴비아가씨’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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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11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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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3살 미만의 전국 미혼여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제15회 영광굴비 홍보도우미 선발대회’ 반대 캠페인을 위해 법성포 단오제가 한창인 숲쟁이공원을 찾았다. 천주교·원불교·여성의전화 회원이 참여하는 ‘영광여성자치연대’ 회원 10여명이 행사장과 행사장 입구를 돌며 ‘미인대회 반대’ 전단을 나눠준다.

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3년 전부터 영광굴비아가씨 선발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고 피켓시위 등 지속적인 반대활동을 벌인 끝에 며칠 전 주최쪽과 면담을 통해 2004년에는 영광굴비 홍보를 위한 적극적인 대안을 함께 찾아보자는 전제로 ‘미인대회는 올해로 마지막’이라는 합의를 끌어낸 터였다.

아마도 2년에 걸쳐 수녀님, 원불교 교무님, 지역 여성들이 동원된 피켓시위가 적잖이 부담이었나보다. 우리도 올해는 합의정신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반대시위 계획을 접고 법성포단오제와 영광굴비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되기를 바라는 애정을 담은 전단 배포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절반은 행사장 홍보를 맡고 수녀님과 몇명은 200여개의 상가가 밀집해 있는 법성포구쪽으로 발길을 놓는다.

전단을 나눠주자 “여자들 상품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제?”라며 아는 척하기도 하고 “커피 한잔하고 가라, 우리 상가들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적극적인 격려를 보내준다. “아 긍께 굴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그덜 델꼬 서울백화점 가문 뭣혀, 꿀 먹은 벙어리고 돈만 들제. 아무짝에도 쓸모없당께”라며 시원한 물만큼이나 시원한 대답들이었다.

분위기에 고무되어 뙤약볕에도 힘든 줄 모르고 상가를 돌고 있는데 너댓명의 아저씨들이 모여 있던 곳에 전단을 전해주던 수녀님에게 상가아저씨들 말씨름을 놓는다.

“어이 집이들(당신들)도 징허게 헐 일들 없소. 여그 사람들도 아님서. 굴비아가씨 아님 굴비 못판당께~~~”라며 한심한 눈짓으로 화부터 낸다. 강적을 만났다. 어떤 말도 들으려 않고 막무가내로 할 일 없는 여자들로 몰아붙인다.


“아저씨들의 생각만이 옳은 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의견도 들을 줄 아세요. 저희도 영광사람입니다. 할 일 없는 저희들 바빠서 그만 갑니다. 부디 전단이나 끝까지 읽어보세요”라는 말로 자리를 끝낼밖에….

시골동네에서 여성운동하려면 이 정도 저항과 막말이 예사이지만 수녀님까지 당한 봉변에 화가 난다. 오히려 수녀님은 “그래도 우리편이 많잖아요?”라며 격려를 주신다. 어느덧 상가를 한바퀴 돌고 마지막으로 행사 모니터를 위해 숲쟁이공원 풀밭에 주저앉는다.

한창 출전자들이 자기소개 중이다. “예로부터 임금님의 수랏상에 오를 정도로 맛과 영양이 풍부한 영광굴비는 단백질 아니 지방이 풍부하며….” 한결같은 멘트로 영광굴비 소개를 하던 한 출전자가 떨린 탓인지 말이 엉키며 ‘단백질’이 풍부한 영광굴비가 ‘지방’이 풍부한 음식으로 변한다.

3년째 영광굴비아가씨가 영광굴비 홍보도우미로 이름만 바뀐 채 진행되는 것을 피켓까지 들고 인내심으로 지켜봤지만 올해 역시 다르지 않다. 결국 끝까지 자리를 지키는 인내심을 발휘하는 데 실패하고 내려와야 했다.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데 위안 삼으며….

숲쟁이공원 한쪽에 매달린 그네가 시원스레 하늘 향해 몸을 날리고 장사들의 씨름대회가 열릴 모래판이 유혹하는 법성포 단오제를 ‘미인대회’ 공방 없이 내년엔 온전히 느껴보고 싶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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