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또 다른 당신을 만나시죠”

462
등록 : 2003-06-04 00:00 수정 :

크게 작게

〈두개보다 많은 그림자〉 공연 앞둔 안무가 홍승엽씨… 추상적 주제를 몸짓으로 풀어내는 솜씨 돋보여

2000년 이후부터 ‘리옹’은 대중에게 안무가 홍승엽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됐다. 프랑스 리옹 댄스비엔날레 초청 공연에서 <달보는 개> <데자뷔>가 5회 연속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외국 평론가들의 상찬이 쏟아지자 평소 그의 춤에 공감해왔던 이들조차 어리둥절해했을 정도였다니 리옹은 그의 이름 석자를 국내외에 확실히 알린 무대였던 셈이다.

6월6~7일 <두 개보다 많은 그림자> 공연(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을 앞두고 한창 땀을 흘리고 있는 홍승엽씨의 연습실을 찾았다. ‘댄스씨어터 온’이 세들어 있는 서울 광진구 구의동 5층 건물 꼭대기엔 새로운 임대자를 구하는 펼침막이 걸려 있었다. “오르는 전셋값을 견디지 못해 지하로 이사하기로 했어요.” 리옹의 영예는 재정적으론 별 도움이 안 된 듯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들


사진/ 안무가 홍승엽씨는 무대에서 표현되는 모든 감각을 조정하려고 한다.
무용수들은 스트레칭이 끝나자 곧 <두 개보다 많은 그림자> 연습에 들어갔다. 그가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품은 생각은 이렇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또 다른 정체성을 그림자에 비유한다. …내 그림자는 몇개나 될까”

난해한 주제를 명징한 이미지로 풀어놓는 솜씨로 이름난 그이지만, 자아와 실존, 기억, 영혼과 같은 추상적인 주제를 어떻게 무대 위에서 표현할지 궁금해졌다.

1부 ‘섀도우 카페’는 술병 따는 소리, 식기들이 부딪치는 소리들이 뒤섞인 음악으로 시작됐다. 네명의 무용수들이 사람 크기의 검은 그림자 앞에 서 있다. 팔다리를 비비꼬고 꿈틀대고 몸부림치지만 검은 그림자를 쉽사리 벗어날 수 없다. 그림자는 예수가 떠멨던 십자가처럼 힘에 부치는 짐이 되기도 하고, 탱고를 추는 무용수의 말 없는 파트너가 되기도 한다. 마음이 몸의 집인가, 몸이 마음의 집인가. 살과 뼈에 갇혀 있던 색색깔의 영혼들은 몸을 뛰쳐나와 춤판을 벌인다. 2부 ‘두 개 보다 많은 그림자’는 흰 벽 뒤에서 그림자 무언극을 벌이는 인형들과 무대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로 대별된다. 스크린 위로 그림자 새가 날고, 그림자 구름이 떠가고, 그림자 여인이 지나가는가 하더니 이내 검은 실루엣은 무용수의 몸을 얻는다. “늘 태양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해바라기는 뒤돌아 자신의 그림자를 한번도 본적 없지만 그림자는 늘 그를 좇아다닌다. 아니, ‘업보’처럼 지배한다.” 개가 주인에게 끌려다니는 것처럼, 제맘대로 행동하는 듯해도 결국엔 업보의 사슬에 묶여 있는 무용수의 몸짓은 이런 상황에 대한 우화이다.

3월3일부터 두 번째 권에 들어간 <…그림자> 안무 노트엔 무대 장치, 음악, 동선에 대한 아이디어가 가지런히 적혀 있었다. “보통 안무가라고 하면 움직임만을 설계하는 일로 생각하지만, 나는 무대에서 표현되는 모든 감각을 조정하고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최종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10년 동안 김태근(음악 담당), 천세기(조명 담당)씨 등과 호흡을 맞춰 왔지요.”

아직도 직업으로서의 춤은 멀고 멀어

대학교 2학년 때 ”춤을 안 추고는 배길 수 없어” 무작정 무용학과를 찾아갔던 공대생(그는 경희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은 93년 ‘댄스 씨어터 온’을 창단해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 현대무용단을 만들었고, 이제 한국 최고의 춤꾼자리에 올랐다. 그림자처럼 스며 있던 열정을 끄집어내 불살라온 그가 소망대로 하루빨리 ‘직업 무용단’을 꾸려가길 바라며 연습장을 나섰다. 그는 14명의 무용수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프로’이긴 하되 ‘직업’은 아니라고 했다. ‘프로’가 ‘직업’을 갖는 문제는 아마도 우리나라 무용시장의 수준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일 것이다.

글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orgio.net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