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소설로 되살아나는 〈아리랑〉의 조선인 혁명가… 대륙을 누비며 고통을 보듬었던 아웃사이더의 생애
거리의 함성과 열정, 상처가 이끌었던 1980년대, 젊은이들의 영웅이었던 <아리랑>의 혁명가 김산이 돌아온다. 민족주의자였으나 국제주의자였고, 무정부주의자였다가 마르크스주의자로 삶을 마감한 이 조선인 혁명가의 삶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명필름이 그의 삶을 그린 영화를 준비하고 있어 내년에는 스크린에서 김산을 만날 수 있다. 한홍구 성공회대 역사학과 교수가 계간 <황해문화> 여름호(6월1일 발행)에 쓴 ‘김산, 못다부른 아리랑’도 관심을 끈다.
‘못다부른 아리랑’은 학자가 썼지만 역사논문이 아니라 김산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트로츠키파이며 일본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비밀 처형되기까지 옌안에서 최후의 나날들을 쓴 1인칭 소설이다.
조선의 독립과 대륙의 혁명을 꿈꾸다
젊고 명석한 여성 언론인이며 작가였던 님 웨일즈(<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가 스노의 부인)가 김산(본명 장지락·1905~1938)을 만난 것은 1937년 7월 장마가 계속되던 중국 서북부의 오지 옌안이었다. 미지의 나라 조선에서 온 열정적이고 날카로운 아웃사이더의 삶에 매력을 느낀 웨일즈는 김산을 20번 넘게 만나 이야기를 나눈 끝에 <아리랑>을 썼다. 이 책에는 평양에서 태어나 열다섯살에 집을 떠나 신흥무관학교와 의열단을 거쳐 중국공산당원으로 만주와 베이징, 광동, 옌안을 누비며 조선의 독립과 공산혁명을 추구하던 김산의 삶이 담겼다.
<아리랑>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1년 동안 김산의 마지막 삶은 어땠을까? 한 교수가 쓴 ‘못다부른 아리랑’은 이 질문에서 시작해 <아리랑>의 끝인 1937년 9월 이후 1938년 가을 김산이 중국인 ‘동지’들의 총을 맞고 죽기까지 1년 동안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을 추적한다. 물론 완전한 허구는 아니다. 한 교수가 김산의 여정을 따라 중국을 답사하며 찾아낸 자료와 중국 공산당 사료 등을 기초로 한 교수의 상상력이 더해졌다. 한 교수는 “논문을 쓰려고 했지만 김산 개인에 대한 자료가 너무 부족했다. 김산과 관련된 단편적인 사실에 1938년 중국공산당 내부의 정황을 더하고, 나머지는 상상력으로 메울 수밖에 없어 소설로 썼다. 부족한 실증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열망이 이 소설을 쓰게 했다”고 말한다.
님 웨일즈를 만났을 때 이미 김산은 일본 경찰에 두번 체포돼 고문을 받았지만 그냥 풀려난 것은 수상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의심을 받아 당적을 박탈당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중국 공산당이 ‘대장정’ 끝에 도달한 옌안까지 그가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것도 결백을 밝히고 당적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못다부른 아리랑’에서 김산은 계속 자신을 의심하는 당에 좌절하면서, 항일군정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중국혁명에 젊음을 바쳤으나 조선인이기 때문에 중국공산당의 아웃사이더가 됐다.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들답게 연안의 간부들은 자신감과 활기로 넘쳐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무언가 그들과 나 사이에 벽이 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이 삭막한 연안 땅에서 나는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특히 김산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중국 혁명에 참가했다가 죽은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다. “너무 많은 청년들, 조선혁명의 정수 수백명이 광동에서 사라져버렸다. 물 속의 소금처럼 흔적도 없이….” 후일 공산당 혁명가를 작곡한 조선인 후배 정율성은 이 시절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다.
그에게 베이징의 아내는 곧 아이를 낳게 된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결국 이 아이를 그는 한번도 만나지 못한다. 1938년 봄 당 최고 지도자 한명이 옌안을 탈출해 국민당에 투항하자 공산당은 당내에 침투한 반당분자, 트로츠키파, 일제와 국민당 협력자를 찾아내려는 ‘서간공작’을 대대적으로 벌였고 김산은 일제 협력자로 지목된다. 만주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일제 스파이로 몰려 죽은 민생단 사건에 간여했고, 후일 중국비밀경찰의 실력자로 악명을 날리는 캉셩은 결국 김산의 처형을 지시한다.
일제 협력자로 몰려… 너무 투철해서 극단적인
영화 <아리랑> 시나리오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는 한 교수는 “영화 작업을 하다 보니 역사학 세미나에서는 다룰 수 없는 더 깊고 내밀한 부분에까지 김산에 대해 생각을 많이하게 됐다”며 “그는 분명 뛰어난 혁명가였고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 고민하며 한·중·일을 넘나들며 격동의 역사를 헤쳐나간 사람이지만 성격은 고집 세고 경박하고 지나치게 급한 면도 있었다”고 말한다.
소설에서 김산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회한에 잠긴다. “지난 세월, 나는 후회 없이 살아왔지만, 내가 꼭 옳았던 것은 아니다. 나는 늘 반응이 빠르고 민감했으며 극단적이었다. 아니, 나뿐이 아니다. 우리 조선인은 이국 땅에 내몰린 보잘 것 없는 소수자들이다. 우리 망명자들은 병적으로 민감해져 있고, 우리의 삶은 비정상적이다.” 용감하게 대륙을 누볐고 고통을 통해 끊임없이 성찰했던 그는 마지막 순간 고향을 떠올린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사진/ 한홍구 교수는 〈황해문화〉 여름호에 김산의 최후를 1인칭 소설로 쓴 ‘김산, 못다부른 아리랑’을 발표했다.
젊고 명석한 여성 언론인이며 작가였던 님 웨일즈(<중국의 붉은 별>을 쓴 에드가 스노의 부인)가 김산(본명 장지락·1905~1938)을 만난 것은 1937년 7월 장마가 계속되던 중국 서북부의 오지 옌안이었다. 미지의 나라 조선에서 온 열정적이고 날카로운 아웃사이더의 삶에 매력을 느낀 웨일즈는 김산을 20번 넘게 만나 이야기를 나눈 끝에 <아리랑>을 썼다. 이 책에는 평양에서 태어나 열다섯살에 집을 떠나 신흥무관학교와 의열단을 거쳐 중국공산당원으로 만주와 베이징, 광동, 옌안을 누비며 조선의 독립과 공산혁명을 추구하던 김산의 삶이 담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