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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역사의 수레는 레일을 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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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0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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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에서 비롯된 근대의 풍경 속으로 진입… 기적소리는 한반도를 어떻게 바꾸었는가

철도의 등장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도 근대도 없었을 것이다.

철도는 인터넷도 넘볼 수 없는 거대한 기술 혁명이었다. 철도를 따라 한곳에 매여 있던 인간은 공간의 장벽을 넘었고, 자본주의가 생산한 상품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 이동했으며, 서구는 세계를 식민지로 삼았다. 그리고 서구를 표절한 일본은 조선을 식민화했다.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 박천홍 지음, 산처럼 펴냄.
박천홍 <출판저널> 전 편집장이 내놓은 <매혹의 질주, 근대의 횡단>(산처럼 펴냄)은 철도라는 근대의 상징을 통해 한반도가 강제로 떠안은 근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해석한다. 철도공무원의 아들로 어린 시절 전라남도 순천 기찻길 근처에 살면서 오가는 기차를 바라보곤 했다는 지은이가 철도를 소재로 사료와 소설, 수필, 회고록, 역사서, 당시의 사진들을 솜씨 좋게 엮어낸 이 개성 있는 근대사는 풍성하고 매혹적이다.

근대 문명의 축복에 핏자국 서려


“1899년 9월18일 오전 9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철마가 길고 날카로운 일성을 토해냈다. 노량진과 제물포 사이를 가로지르는 경인철도의 첫 기적소리였다. 이 낯선 문명의 소리는 이 땅에 근대의 새벽을 알리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식민지의 어둠을 예고하는 불길한 소리이기도 했다.” 고작 시속 20~30㎞의 이 열차에 대해 <독립신문>의 기자는 “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바라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달리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며 충격을 감추지 않았다.

한반도에서 철도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철도는 식민지 백성의 삶을 덮친 양날의 칼이었다. 식민지 철도의 레일 위에는 선연한 핏자국이 서려 있었다. 일본 통치자들은 철도가 조선 식민지 경영, 대륙침략의 핵심임을 일찌감치 알아챘다. 그들은 1885년 무렵부터 밀정을 파견해 서울과 부산 사이를 측량했으며 그것을 기초로 부설한 경부·경인 철도는 일본의 군대와 상품, 일본으로 가져갈 식량과 천연자원을 부지런히 실어날랐다. 당시 아이들은 “양귀는 화륜선을 타고 오고 왜귀는 철차타고 몰려든다”는 동요를 불렀다.

일본은 대륙침략의 병참로를 만들기 위해 경부선과 경의선을 무리하게 서둘러 건설하면서 부근 농민들과 부녀자들, 어린아이들까지 강제동원했다. 이들은 아무 보수도 받지 못했으며 채찍을 맞으며 선로를 놓았다. 토지를 철길에 빼앗긴 농민들은 빈농이 돼 떠돌거나 간도로 떠났다. 김기림은 시 <심장 없는 기차>(1933)에서 “우리들은 지난 밤도 마을에서 십리나 되는 정거장에서 떠나가는 이, 남아 있는 이, 슬픈 ‘잘 가오’와 ‘잘 있고’를 몇번이고 불렀다오. 기차가 어둠을 뚫고 북으로 뛰어간 뒤에는 검은 철길이 우루루 울었오”라고 국경을 넘는 간도 이민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한편으로 그것은 부패했던 왕조시대를 벗어나는 촉매가 됐고 산업 발전의 수단이었으며, 전국을 단일한 경제권과 의사소통 공간으로 바꿔놓아 상상의 국민 공동체 의식을 심어줬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도 철도를 통해 오갔다. 또 일상의 곳곳을 파고들어 바꿨다. 해와 달의 운행에 맞춰 살았던 사람들은 기차시간표와 역앞 시계탑으로 대표되는 근대의 시간, 한치의 낭비도 허용되지 않는 문명과 속도의 강박증에 훈육됐다. 1935년 이상은 수필 <첫 번째 방랑자>에서 “경성 신의주 6시간 하고도 이십분, 스피이드업한 국제열차”라고 쓰고 있다. 이태준도 산문 <만주기행>에서 “그때(조선시대)는 고작 말을 탔을 것이다. 일행 불과 60, 70리였을 것이다. 이제 누워 야행천리를 하면서 생각하기에는 아득한 전설이 아닌가!”라고 감탄을 토해냈다.

봉건질서 흔들리고 계급질서 자리잡아

기차 안에서 봉건질서도 흔들렸다. 최남선이 일본 창가형식의 <경부철도가>에서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내외 친소 다 같이 익혀 지내니/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라고 쓴 것처럼 기차 안에 남녀노소 내외국인이 섞여앉게 되면서 엄격했던 신분의 장벽과 남녀가 유별하던 전통사회의 내외법을 흔들었다. 승차권만 있으면 신분이나 남녀와 관계없이 누구나 탈 수 있지만, 대신 1등칸, 2등칸, 3등칸으로 나뉘는 계급질서가 도착한 것이다.

박민희 기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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