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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공룡의 귀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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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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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숙의 사이언스 크로키

영국의 경험주의자 베이컨이 제시한 귀납법은 과학 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큰 방법론이다. 그 요체는 개개의 현상을 종합적으로 관찰하여 전체를 꿰뚫는 일반 원리를 찾는다는 데에 있다. 오늘날 생각하면 이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것 하나 말했다고 역사에 남을 정도의 업적으로 봐주는가?”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이런 의문은 현재의 우리가 그의 방법론이 폭넓게 퍼져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오히려 그 영향력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다. 마치 지표상에 빈틈없이 퍼져 있는 대기 중에 살면서 cm2당 1kg이라는 엄청난 대기압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러스트레이션 | 유은주
그러나 주의할 것은 귀납법도 만능의 방법론은 아니라는 점이다. 베이컨은 당시 사람들이 이성적 근거는 거의 고려하지 않고 신학·철학·속설·미신 등에 근거하여 설명하려는 자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런 취지에서 그는 종족·동굴·시장·극장의 우상이라는 ‘4대 우상’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결론으로 이른바 ‘전제 없는 관찰’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말 그대로의 ‘전제 없는 관찰’은 불가능하다. 아무 생각이 없을 때 외부 현상은 눈의 망막에 ‘비칠’ 뿐 우리의 의식이 ‘보는’ 것은 아니다. 사실 어떤 생각에 골똘히 잠겨 있을 때 짧은 순간이나마 주위의 상황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현상은 누구나 흔히 경험한다. 따라서 문제는 ‘올바른 전제’에 있다. 베이컨의 진짜 의도도 편견이나 잘못된 선입관을 배제하자는 데에 있을 뿐 완전한 무전제를 뜻한 것은 아니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영화 <쥬라기 공원>에 보면 주인공과 두 꼬마가 포악한 육식공룡의 코앞에서 잡혀 먹힐 위기에 처한 상황이 나온다. 주인공은 공룡이 오늘날의 개구리처럼 오직 움직이는 것만을 먹이로 삼는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숨을 죽이고 공룡이 스스로 물러서기만 기다린다. 그런데 공룡의 이런 특성을 모르는 다른 사람은 허둥지둥 도망치다가 오히려 먹이가 되고 만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런 특성은 뇌의 발달이 미약한 데에서 나온다. 즉 그들의 뇌는 정보처리 능력이 부족하며, 이에 따라 “움직이는 것만 잡는다”는 ‘전제’를 갖고서 외부 상황을 관찰한다. 실제로 개구리의 경우 죽은 파리만 널려 있는 곳에 두면 굶어죽을 때까지 아무것도 잡아먹지 못한다.

그에 비하면 인간의 뇌는 훨씬 강력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한계는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아무런 전제 없이 무한히 많은 현상의 무한히 많은 속성을 모조리 관찰하고 인식할 수는 없다. 결국 인간도 어떤 전제를 가져야 함은 필연인데, 위에서 말했듯 요는 그 성격이 문제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아주 좋은 지침으로 “근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basic)는 것이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고심하는 경우 잘 살펴보면 대개 헛된 편견·선입관·고집·욕심 등이 끼여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때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사물의 근본이나 초심(初心)으로 돌아가면 의외로 쉽게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수가 많다. 공룡의 엄청난 육체적 힘이나 우리의 지적 능력은 2차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귀납의 원리에 겸손하게 귀기울일 때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한 우리의 지적 능력도 더욱 활짝 피어날 것이다.


고중숙 | 순천대학교 교수·이론화학 jsg@sunchon.sunch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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