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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노부부의 고추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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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6-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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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도로변 고추밭에서 목발의 노인과 머릿수건 둘러쓴 부안댁이 아침부터 부산스럽다.

두둑도 제대로 없고 바탕비닐도 안 씌운 채 고랑만 대충 맞춰 졸졸이 심어놓은 고추밭에 말둑 박느라 아침부터 부안댁 부부가 힘겨운 엇박자 노동에 매달린다.

고추밭 줄치느라고 부안댁이 대충 박아놓은 말둑 사이을 돌아다니며 목발 짚은 영감님이 망치로 재삼 박아넣고 있다. 목발에 의지해 농삿일 거들러나온 부안양반 머리는 하얀서리가 있는 대로 엉켜 있고 80살 청년 같던 건장한 체구가 홀쭉해져 다른 사람 같아 뵌다.

농번기에도 모자와 몸빼만 입고 다녔지 통 농삿일이라고는 하지 않던 부안댁이 요즈막에는 고추밭에서 하루종일을 버티나 보다. 말년에 일복 터졌다며 동네사람들은 혀를 찬다.

“관리기 그것도 고약해야. 힘 좋던 부안양반이 고추밭 두둑 치다가 헛손질하면서 달라든 관리기에 다리를 다쳤당께. 들여다봐야 혀”라며 아버님은 못자리한 다음날로 광주까지 걸음하셨었다.

두달여 입원 끝에 얼마 전 퇴원은 했지만 농삿일도 걱정되고 혼자 밭에 나간 부안댁이 마음 쓰였는지 매일 밭가를 목발로 서성이며 막가지(막대기) 하나라도 건네주려 애쓴다.

젊은 날 아내와 사별 이후 네 번째 재혼 끝에 부안양반이 맞아들인 부안댁은 지능이 조금 떨어진 듯해도 그만하면 사람 좋다는 평을 받아왔다. 고집도 세고 술을 좋아한다는 흉거리로 입질에 오르내리기는 해도 남의 말 않고 남 퍼주기 좋아하는 성격 때문에 그 정도 흉은 애교축에 든다.


부안댁은 겨울 동네아짐들 모여 있는 화투방에 빠지지 않는 단골손님이다. “부안댁 화투 칠 때는 민화투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게 여시(여우)여야. 근디 셈을 못혀서 아무리 갈차줘도 10 다음 14랑께.” 같은 화투방 멤버인 어머니는 부안댁의 민화투 솜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셈 어두운 부안댁 노후가 걱정된단다.

동네사람들은 힘자랑, 돈자랑 하던 영감님이 돌아가시면 부안댁 불쌍해서 어쩌냐며 벌써부터 걱정이다. 30살이나 차이 나는 그가 영감님 돌아가시면 재산 일부를 받더라도 돈을 관리할 줄 몰라 남한테 둘려먹기(사기당하기) 십상이라며 짠한 걱정들이다.

청년같이 짱짱하던 영감님이 갑자기 늙어버리니 부안댁도 속이 들은 눈치다. 관리기 사고 이후 잦은 봄비로 그나마 두둑도 내려앉아버리고 동네사람들이 맨땅에 고추만 심어놓고 왔다던 고추밭에서 부안댁 부부는 오히려 늙발의 사랑을 키우는 듯하다.

부안댁은 하늘같이 의지했던 영감님의 나이를 실감했을 터이고 속 없는 여자인 줄만 알았던 젊은 아내가 농삿일에 매달리는 모습에 영감님은 기특한 정이 보인다.

오랜만에 인사를 받는 부안양반 환한 웃음만은 그대로이다. 그동안 염색으로 감춰졌던 백발이 모두 드러난 영감님에게 부안댁은 오히려 하늘 같은 의지처인 듯싶다.

두분이 오랫동안 행복했으면 좋겠다. “술 한잔 주랑께”라며 들어서는 부안댁을 오래토록 보고 싶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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