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무관의 골프퀸 “꼬인다 꼬여”

330
등록 : 2000-10-18 00:00 수정 :

크게 작게

프로 데뷔 뒤 최악의 시즌 보낸 박세리… 홀로서기에 따른 스윙고장에 심리적 위축까지

박세리가 왜 저리 안 풀리고 있지. 답답한 건 팬들만이 아니다. 박세리(22·삼성아스트라)도 속탄다. 물론 곁의 가족들도 안타깝기는 마찬가지. 올 시즌 다 끝나가는데 우승은커녕 희소식이 없으니 말이다. ‘골프퀸’ 박세리는 데뷔 첫해 98년 세계 골프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구릿빛 다리에 백옥처럼 새하얀 발. 해저드에서 발을 담그고 샷을 한 것을 모두 기억하리라. 그리고 지난해 4승을 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런데 올해는 잠잠하다. 오히려 ‘슈퍼땅콩’ 김미현(22·154.7cm·n016.한별텔레콤)과 장정(21·151cm·지누스)이 날리고 있다. 둘 다 최근 1, 2위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박세리는 올 최고성적이 3위 하나뿐이다. 사실 박세리의 올 시즌 성적이 아주 나쁜 건만은 아니다. 우승이 없을 뿐이다. 지난해 10월까지 출전한 대회는 24개. 박세리는 우승 4회, 톱10이 9개, 예선탈락이 3회, 포기 1회다. 올 시즌도 내용은 비슷하다. 삼성월드챔피언십을 남겨놓고 21개 대회에 출전해 톱10에 8개 들었다. 컷오프는 1회, 실격이 1회다. 상금을 들여다보자. 지난해 95만6926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런데 올해는 아직 대회가 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절반인 47만1193달러밖에 안 된다. 벌이가 시원찮았다는 얘기다.

코치부재로 탄탄했던 기본기 망가져


결론부터 말하면 박세리는 무엇을 잘못하고 있던 것일까. ‘코치부재’였다. 코치가 없었다. 안 될 때 언제든지 쫓아와 봐줄 코치가 없었다. 데뷔 첫해 박세리는 삼성그룹의 극진한 대접 속에서 세계최고의 골프교습가 데이비드 레드베터에게 지도를 받았다. 이것은 대성공을 거뒀다. 98년 박세리쪽이 부담해야 할 코치비는 절약됐다. 연말에 레드베터를 떠났다. 뭔가 잘되리라는 기대 속에 ‘홀로서기’를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홀로서기는 박세리에게 큰 부담을 준 듯하다. 올 시즌 최고의 샷을 구사하고 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여자 백상어 캐리 웹(24)이 장수하는 것을 보면 어릴 적부터 늘 곁에 코치가 있었다는 것이 설득력 있다.

박세리는 보이지 않게 골프가 망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버텨온 것은 기본기가 탄탄했다는 데 있다. 아마추어 골퍼들도 알듯 지도를 받는 사람이 기량이 유지된다. 혼자서는 절대로 자신의 그릇된 오류를 찾아낼 수가 없다. 사실 2년간은 아버지(박준철씨)가 퍼팅이나 스윙을 나름대로 봐주었다. 그러나 어느 날 박세리 곁에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없어져버렸다. 가급적 박세리를 따라다니지 않는다.

박세리는 한때 타이거 우즈의 스승인 부치 하먼에게 레슨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남자친구가 권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자친구 첸이 부치 하먼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만 흘렀다. 우즈에 매달린 하먼은 너무 바빠서 박세리를 잘 돌봐줄 것 같지 않다는 결론. 이래저래 시간만 보냈다. 그러는 사이 박세리의 스윙은 변해갔다. 결정적인 순간에 무너지는 박세리. 바로 2년간 견고했던 간결하고 콤팩트한 스윙이 어느새 느슨해진 것이다. 박세리도 눈치를 챘겠지만 누구에게 의논할 수 없이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 있었던 게 아니냐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박세리를 매니지먼트하고 있는 IMG는 뭘했을까. 마땅한 코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있었다 해도 박세리쪽의 고집에 부딪혀 코치를 선임하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박세리는 삼성월드챔피언십(10월13∼16일 한국시각)을 앞두고 첫 2년 동안 코치를 맡았던 톰 크레이비(30)와 손을 잡았다. 크레이비의 말을 들어보자. “박세리는 스윙에 결함이 있다. 탄탄함이 부서지고 느슨해졌다. 결정적일 때 드라이버가 고장나는데 이는 중심을 너무 오른쪽에 둬 방향성이 나빠진 탓이다.”

결국 박세리의 스윙은 알게 모르게 심하게 망가져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스윙으로 우승을 기대한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었다. 일설에 남자친구와 멀어져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그럴 것이라는 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그는 최근 박세리의 생일파티에도 왔었고 지난주 뉴알버니에도 모습을 보였다.

부정적 이미지에 끝없이 떠도는 악소문도

(사진/박세리는 스윙자세가 망가지면서 우승권에서 멀어져갔다)
다만 스윙고장으로 인한 성적저조는 박세리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위축을 가져왔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박세리의 마음은 조급해졌을 것이다. 급하면 안 되는 것이 골프다. 이런 점으로 보아 박세리는 올 시즌 ‘안 되는 것이 없이 안 됐다’가 정답이다. 더 중요한 것은 ‘안 되는 것 없이 안 됐다’라고 결론을 지은 박세리에도 문제가 있다. 분명 고장난 스윙이었는데도 안 되는 것이 없다는 것으로 미리 마음에 빗장을 질렀기 때문이다.

스윙고장이 박세리를 옥죄게 하는 기술적 요인이라면 정신적인 면은 어떨까. 결정적으로 이것이 만만치 않다. 박세리에게 심리적으로 가장 큰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것은 박세리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와 밑도 끝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악소문이다.

박세리는 자신이 번 만큼 베풀지 못했다. 박찬호나 김미현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이미지가 좋지 않은 얘기다. 이는 단시일 내에 뒤집을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한동안 입방아에 올랐다. 또 박세리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 하는 것이다. 엽기적으로 떠도는 실체없는 소문들을 박세리도 들었을 게 틀림없다. 이런 여러 상황이 그를 골프에 집중하지 못 하도록 압박을 줄 수 있다. 확인도 안 됐고, 확인할 것도 없는 이런 황당한 악소문이 박세리를 어렵게 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의 웃음을 다시 볼 수 있을 건가

(사진/지난해 11월 99페이지넷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뒤 캐디와 포옹하는 장면)

속성상 골프는 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더욱 미궁으로 빠져든다. 시즌 초반 부진징크스는 예외없이 나타났고 기량이 절정을 보인다는 7월 이후에도 정상권에 접근하질 못했다. 누구에게나 한동안 슬럼프는 올 수 있다. 98년 박세리와 애니카 소렌스탐이 주가를 올릴 때 캐리 웹은 필드에서 내내 소리죽여 울음을 삭여야 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웹은 부활해 올 시즌 박세리와 소렌스탐이 주춤하는 사이 최고의 샷을 보여주고 있다.

박세리는 ‘부진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부진탈피는 시간문제일 수 있다. 새로운 코치와 손발을 맞춰 겨우내 혹독한 트레이닝을 하면 된다. 10월 말 제주도에서 열리는 바이코리아오픈에 출전해 김미현과 함께 국내 팬들에게 자신의 기량을 선보일 박세리. 그가 하루빨리 명성을 되찾길 팬들은 학수고대하고 있다. 박세리는 이제 새로 태어날 것이다. 든든한 옛 코치를 새로 만났으니까. 조만간 낭보는 전해주지 못할지라도 박세리의 웃는 모습은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

안성찬/ 스포츠투데이 골프전문 기자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