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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이호재] 심드렁하되, 매서운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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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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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라면 어딘가 모를 구석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연극계의 거목 이호재

그는 올해 우리 나이로 예순 셋이다. 우리나라 연극사에 거목으로 남을 배우인 그가 세속적인 명성을 누리지 못한 건 온전히 그의 지나치게 ‘심드렁함’ 때문일 거다. 난 단 한번도 그가 뭔가를 목숨 바쳐 했다는 걸 들어보지 못했다. 그저 모든 걸 ‘아님 말고’ 하는 자세로 사는 것 같았다. 지금 그는 남자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어하는 <세일즈맨의 죽음>의 아버지 역을 맡아 공연 중이다.

한번도 ‘미친’ 적이 없다고?

사진/ 류우종 기자
인터뷰를 끔찍이 싫어하는 것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요인 중에 하나이리라. 나를 그저 조카처럼 예뻐하기에 잠깐 만나주는 것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인터뷰인데 전날 마신 술이 깨지 않아 눈은 벌겋고 옷은 집에서 누워 있다가 담배 사러 나온 차림이었다. 부모님 상 치렀을 때와 무대 위를 제외하고는 평생 정장을 입어보지 않았다는 말은 참 그다웠다.


그는 정말 연기를 잘하는 배우다. 발성이나 발음이나 역할 해석이나 무대 장악력이나 그 어느 것도 아쉬운 구석이 없는 배우다. 한데 너무 놀라운 건, 그는 연기도 뭐 그리 미치도록 좋아서 하는 게 아니란다. 그럼 도대체 60년을 넘게 살아온 인생 중 뭔가에 미쳐본 적이 있느냐니까 별로 없는 것 같다며 귀엽게(?) 웃는다. 난 혼란스러웠다. 한번도 ‘미친’ 적이 없다면 내가 무대 위의 그를 볼 때마다 느꼈던 매서운 눈매는 어디서 나오는 에너지란 말인가.

그는 사람이라면 특히 배우라면 어딘가 모를 구석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그의 지론대로라면 그야말로 배우다운 배우요, 사람다운 사람인 게다. 평생을 그와 가깝게 지낸 내 부모조차 그를 연기 잘하는 배우라는 거말고는 ‘참 모를 사람’이라고 하니 말이다. 인생의 카테고리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정작 그와 대화를 나눠보면 그의 박식함에 깜짝 놀라게 된다. 10년 넘게 라디오에서 한 프로를 진행하면서 거의 매일을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만나 ‘맞장’을 떴던 것과 타고난 역마살로 인해 틈만 나면 짐을 싸서 길을 떠났던 것이 자양분이 됐던 걸 게다. 여행 하면 나도 할 얘기가 많은지라 어디어디를 다녀왔나 물으니 한참을 세다가 안 가본 나라를 세는 쪽이 더 빠를 것 같다며 또 ‘귀엽게’ 웃는다. 그것도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떠나는 진정한 여행자로서 지구 곳곳을 누볐으니 그 옆에 있으면 항상 바람소리가 났던 건 바로 그 때문 이었나 보다.

그가 배우가 된 사연을 들으면 무대 위에서 보여지는 그의 카리스마의 원천이 더더욱 궁금해진다. 배우가 된 동기 역시 너무나 심드렁하기 때문이다. 스무살. 별로 하고 싶은 게 없는 청년시절이었지만 과를 선택해야겠기에 외교관이 되면 멋있을 것 같아 정치외교학과를 들어갔다. 때는 1960년. 어수선한 시국이었지만 별 시대의식이 없었던 그는 목소리가 우렁차다는 이유 하나로 한 선배의 손에 이끌려 학생들 앞에서 뭔가를 읽었다. 그건 4·19 성명서였고 그는 입학한 지 몇달 채 되지도 않아 제적을 당하고 만다.

부모님께 송구해서 두달 동안 가출을 했다 돌아온 그는 가을학기에 입학을 할 수 있는 학교를 찾았고 그런 학교는 서울예전밖에 없다는 걸 알았다. 과는 딱 두개. 연구과와 연기과. 그나마 연구과는 다른 대학을 나온 뒤에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이어서 그냥 그야말로 ‘하는 수 없이’ 들어간 곳이 연극과였다는 거다. 그래도 평상시에 딴따라쪽으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으니까 선택한 것이 아니냐 물으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고. 그러니 들어가서 대학생활이 재밌을 리 없었던 그는 허구한 날 학교 밖에서 술을 마셔댔다(그의 술 실력은 이때부터 내공()이 쌓였으리라).

명동을 배회하다 ‘김벌래’를 만나다

사진/ 지금 그는 남자배우라면 누구나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어하는 〈세일즈맨의 죽음〉의 아버지역을 맡아 공연 중이다.(류우종 기자)
그렇게 명동을 배회하다 우연히 비슷한 술꾼인 김벌래(음향전문가)를 만났고 심심한데 연극이나 하자는 김씨의 권유로 학교 울타리 밖에서 처음 무대에 섰던 것이 <생쥐와 인간>이라는 작품이었다. 정말 그야말로 ‘그냥’ 한 거였는데 반응은 엄청났고 그제야 자신이 연기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다는 거다. 겨우겨우 ‘조금’ 재밌는 걸 발견한 그는 그 뒤로 40년을 무대에 섰다. 단지 다른 일보다 ‘조금’ 흥미로웠을 뿐이었다는 배우 짓을 말이다. 만약 성명서 낭독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 그는 뭘 하며 살고 있을까? 많은 후배들에게 ‘배우를 하게 된 동기’를 부여한 배우의 동기치고는 너무나 심드렁하지 않은가.

청년시절 얘길 좀더 들려달라고 했다가 깜짝 놀랄 얘길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게 됐을 때 뭘 하고 먹고살아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월남전엘 지원했다는 거다. 허걱! 월남이라니…. 맘이 무거워졌다. <한겨레21>에서 펼쳤던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에 마음을 함께하고 있는 터라 질문을 하기가 조심스러웠다. 만약 그도 민간인 학살에 동참했던 입장이라면 그는 내 ‘젊은’ 역사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민간인 학살에 대해 물으니 자신은 베트남 전쟁 초기인 66년에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가서 13개월 있다 왔는데 그땐 전쟁의 열기가 그리 뜨겁지 않을 때였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은 한 마을을 공격할 때 폭격기와 대포가 마을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든 뒤 들어가는 포병이었는지라 주검들만 실컷 봤을 뿐,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사람을 죽여본 일도 죽이는 걸 본 적도 없다고 했다. 휴… 다행이다. 그래도 민간인 학살에 동참하지 않은 게 그의 의지는 아니었을 뿐이므로 ‘상황’이 닥치면 어쩔 수 없었으리라.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데도 무수한 민간인들, 특히 어린아이들이 우리 군인들 손에 죽임을 당한 사실을 아는가를 물었다. 자신도 귀국 뒤 흉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말아야지 일단 일어나면 민간인 사상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는데도’라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못들은 척했거나.

그러면서 그는 전쟁은 나쁘지만 그 전쟁으로 인해 우리나라가 잘살게 됐으므로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본다는 말도 덧붙였다. 난 조금 화가 났다. 우리나라가 잘먹고 잘살게 되는 조건이 다른 나라 사람의 피라면 그건 정당하지 못한 것 아니냐 물었다. 그는 아주 잠깐이었지만 무대 위에서 보여주던 예의 그 매서운 눈빛으로 날 보며 말했다. “전쟁보다 무서운 게 뭔지 아느냐. 그건 가난이다. 가난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잘잘못을 따지는 건 너무 단순한 흑백논리다”라고. 난 불행히도 가난을 몰랐으므로 그의 결연한 눈빛에 주눅이 들고 말았다.

‘귀여운’ 웃음은 제스처인가

그의 보수적인 역사관은 예상 못한 게 아니므로 별로 놀라진 않았다. 하지만 그 눈빛, 오직 무대 위에서만 보여주던 매서운 눈빛을 아주 잠깐이지만 ‘무대 밑’에서 볼 수 있었고 섬뜩하기까지 한 에너지를 느꼈던 것이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가 그렇게 술에 숨어살고 ‘귀엽게’ 웃으며 연기 이외의 모든 일상을 그저 심드렁하게 살아내는 건 그 ‘무서운’ 에너지를 사람들에게 쉽게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제스처’가 아닐까 하는…. 그는 정말 참 모를 사람이다.

오지혜 | 영화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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