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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늦봄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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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3-05-2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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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례할머니와 순애할머니가 얼굴에 분을 뽀사시하게 바르고 마을회관에서 우리를 반긴다.

오늘이 마침 보건소 진료날인지 소풍가기 전에 할머니 학생들 엉덩이 까고 주사대기 중이다. 절반이상이 허리 굽고, 다리 절며 일상적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는지라 일주일에 한번 정기적으로 약과 주사를 맞는단다.

법성 장자동에서 한글교실을 시작한 지 4개월여 만에 은하수반이 책 1권 끝낸 기념으로 책걸이 겸 소풍을 가기로 한 날이다.

ㄱ, ㄴ부터 시작했던 노인학생들, 어느새 통단어 외우고 실력을 뽐낸다. 내 이름 석자라도 알게 된 게, 버스라도 제대로 타게 된 게 얼마나 천지개벽인지 모르겠다며 한사코 말려도 공부 끝나면 작은 간식이라도 내놓으려고 애쓰신다. 손바닥 때린다고 으름장을 줘도 “이건 우리 맘인께 냅둬”라는 애교와 함께….

흐드러지게 길가마다 피어제친 하얀 찔레꽃이 마음을 흔들어놓고 모내기에 들어선 봄의 막바지에 노인학생들은 3대의 차에 나눠타고 원불교성지인 백수 길룡리로 길을 잡는다. 밤마다 공책 붙잡고 씨름하는 규원 할머니가 기특한지 영감님은 아침 일찍 키우던 씨암탉을 잡아 읍내 닭집에 맡겨 튀겨놓았으니 찾아가란다.

법성에서 백수로 넘어오는 길엔 연자줏빛 해당화가 부끄럽게 피어 있고 유일한 부부학생인 안순, 태호 할아버지 부부는 신혼부부처럼 수다가 끊이질 않는다.

오재미 돌리기, 풍선 터뜨리기가 오가고 관광춤에 맞춰 ‘소양강처녀’가 흘러나오자 한글교실의 청일점 최태호 할아버지가 구성진 목소리로 모심기타령을 불러제친다. 여기저기서 “오빠”가 터져나온다.


피구놀이와 댄스, 빼빼로 놀이로 지쳤을 법도 한데 노랫소리만 나오면 자동으로 관광춤판이 벌어진다. ‘영광에 한평생을 살아도 여그까정 나오기는 처음’이라는 할머니들은 서해안을 따라 이어진 해안도로에 들어서자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발한다.

하반신이 불편해 휄체어에 의존해야 하는 안순 할머니가 그냥 차 안에서만 구경하겠다고 한사코 거절해도 기언치 휄체어에 태워 바닷가 가까이 전망대로 밀고가니 영감님 입이 헤 벌어진다. “오늘 이 양반들 부부만 좋은 일 났당께! 꼴로는 못 보겠어”라며 주변사람들에게 지청구를 들어도 마냥 좋으신가 보다. 전망대 팔각정에서 “섬마을 선생님”에 맞춰 춤 한판 돌리고 불갑사로 차를 앞세운다.

영광사람이라면 한번씩 가봤을 법한 불갑사를 우리 노인학생들 중 절반 이상은 처음길이라는 말에 속놀람을 감추기 위해 “법성서 여그는 끝과 끝인께 오기 쉽습디까”라며 얼버무린다.

인도의 마라난타 스님이 우리나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처음으로 들어온 곳이 법성항이고 이곳에 처음 절을 세운 게 불갑사라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 소풍은 백제불교 최초 도래지를 밟아오고 있었다.

한글 배워서 뭣할라냐는 우문에 “영감에게 기나긴 연애편지 한번 해보고 잡아서(싶어서)”라는 답에 배꼽 잡고 “나 죽으면 저승길 제대로 찾아야 하는디 잘못 가서 엄헌 디로 가믄 워째”라는 말엔 가슴이 젖는다.

이제사 눈뜨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노인학생들, 오늘 한나절 소풍으로 몸살이나 나지 않았을까 걱정이다.

이태옥 | 영광 여성의 전화 사무국장

일러스트레이션 | 경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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